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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수신 Dec 31. 2017

조금만 굽히면 삶이 편하다 -
꼬부라진 디자인

똑바로 하는 것만이 답이 아니다. 조금 굽혀서 훨씬 편리해진 디자인.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라는 독특한 제목의 책이 있었다. 우리나라 현대 개그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전유성의 책으로, 사회적 관습에 맞추어 반드시 지켜야 하거나 옳게 살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현실에 타협하면서 살면 생각보다 훨씬 편하다는 이야기다. 제목에 일반적으로는 부정적으로 쓰이는 단어인 "비겁한"을 써서 반어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그 답다. 살다 보면 관습이나 속담, 교훈 등에 등 떠밀리듯이 사는 경우가 많다. 착하게 살아라, 법을 지켜라, 열심히 해라, 남의 모범이 되어라 등등. 하지만 전유성은 예를 들어 "시작은 반이 아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많다, 신호를 어겨라, 편견을 가지자, 남과 비교하라"같은 자세로 살면 삶이 더 편해진다는 요지의 책이다. 이런 생각에 동의를 하고 말로는 독자의 뜻에 맡기기로 하고.


디자인을 하다 보면 문제를 똑바로 파악하고, 올바른 해결 방안을 내고, 그 아이디어를 제대로 된 물건으로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물론 이게 당연한 일이긴 한데 때로는 이 때문에 디자이너의 생각하는 방식이 굳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게 문제다. '똑바로 된' 물건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물건은 좌우 대칭에, 안정감 있는 모양을 하고 있기 십상이다. 조금 굽혀서 디자인된, 그 덕분에 사용하는 사람을 훨씬 편하게 만들어 준 디자인 이야기를 해보자. 꼬부라진 디자인. 그래서 삶을 편하게 해 주는 디자인.




꼬부라진 발톱 깎기


발톱을 깎는 것은 의외로 고통스러운 일인 건 아마도 대개 팔보다 다리가 더 긴 때문이 아닌가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톱과 발톱을 같은 도구를 사용해서 깎다 보니, 발톱 깎기를 잡은 손의 모양도 이상하고, 엉거주춤하게 앉은 모양도 이상하고, 모든 게 다 이상하게 된다. 고개는 최대한 숙이고, 무릎은 최대한 세우고, 팔은 가능한 한 뻗어서 발톱깎이는 나를 향해 잡다 보니 어쩌다 등에 결리기도 하는 경우에는 다 나을 때까지 발톱 깎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일본 그루밍 툴의 명가라고 할 수 있는 KAI가 만든 Kershaw Universal 손톱깎기는 명작이다. 일반적인 손톱깎기는 그야말로 "깎기"부분에만 충실한, 그러나 사용하기에는 미끄럽고 불편한 도구다. 얇은 스테인리스 철판을 주 소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잡기가 상당히 불편하고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기 일수인데, 이 Kershaw 손톱깎이는 MIM, 즉 Metal Injection Molding, 즉 금속 사출 성형이라는 다소 낯선 방법을 사용해서 볼륨 있는 형태를 만들어 내었다. 시각적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손에 잘 잡히는 형태이고, 또 특히 발톱을 깍을때 심하게 허리는 구부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인클루시브 디자인 (혹은 유니버설 디자인)의 철학에도 딱 맞는다. 이 정도 디자인이라면 발톱을 깎는 일이 고통이 아니라 리츄얼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다 보니 보통 발톱 깎이에 비해 가격은 네댓 배 비싸다.



꼬부라진 물파스 용기


물약 용기의 디자인은 언제나 똑바로, 안정감 있게 만든다. 장난감이나 장식품이 아니니까 불필요하게 주의를 끌 필요도 없고, 그저 심각한 디자인으로 잘 만들면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약품으로 파스가 있는데, 이것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물파스는 관절통, 근육통뿐만 아니라, 벌레 물린데도 바르고, 다른 여러 용도로 사용하는,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처럼 쓰인다. 이 물파스의 용기도 처음 등장할 때는 당연히 똑바르게 생긴 용기였었다. 1985 년에 발표된 현대 물파스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한 번에 깨뜨린 꼬부라진 디자인으로 눈길을 끌었는데, 광고 영상에도 꼬부라진 디자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꼬부라진 몸통 덕분에 물파스를 바르기가 상당히 쉬워졌다. 등이나 어깨 같은 곳에 바를 때에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1985년 꼬부라진 현대 물파스 광고 영상


디자인은 물파스 용기의 '목'이 45도 구부러진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다. 목이 똑바른 용기에 비해서 제작에 더 많은 어려움이나 비용이 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용성이 우수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직관성이 있고, 다른 제품들에서 쉽게 구분되는 차별성까지 있어서 디자인의 가성비는 최고다. 구부러진 목 때문에 병이 쉽게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랫부분을 넓고 평평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잡기도 훨씬 더 편해지고 레이블도 더 잘 보일 수 있게 된 것은 보너스다. 

꼬부라진 우유병


대략 20년 전 미국 출장길에 아내의 부탁을 받고 mall에 아기 우유병을 사러 갔다가 발견한 꼬부라진 우유병은 한눈에 보기에도 편리할 것 같았다. 아기 우유를 먹이려면 가급적 젖꼭지가 아기 입에 편안하게 물릴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꽤 이상한 자세로 몇십 분씩 팔을 들고 있어야 하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팔을 내리면 젖꼭지가 제대로 물리지 않을 수 있으니 잠깐 쉬더라도 곧바로 팔을 들고 있어야 한다. 


한데 이 몸통이 30도 정도 꼬부라진 우유병 - 아마 Johnson & Johnson 브랜드로 기억되는데 아닐 수도 있다 - 은 내가 팔을 몸에 편안히 붙이고 있어도 아기는 전혀 불편함이 없으니, 신통할 수밖에 었었다. 그날부터 아기 젖 먹이는 일이 훨씬 쉬워진 것은 다분히 디자인의 힘이다. 


아기용 제품 메이커인 evenflo의 꼬부라진 우유병


사실 엄마나 아빠가 쉬워진 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아기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즉, 우유병을 너무 높은 각도에서 먹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귀의 염증이 생기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자세한 것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므로 이 정도에서 생략하도록 하겠다)

Playtex사의 꼬부라진 우유병


지금은 Evenflo, Playtex 등 여러 메이커에서 생산되고 있는 이 꼬부라진 우유병은 위의 물파스 병과 마찬가지로 제작에 더 어려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용이 더 드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부모와 아기 모두가 혜택을 누리게 되니 이 또한 훌륭한 디자인이다.

요즈음은 모유 수유와 우유병으로 수유하는 경우를 위해 엄마 가슴과 우유병의 차이를 아주 적게 느끼도록 만든 디자인의 우유병도 있다. 이 역시 아기가 편안히 우유를 먹고 또 귀에 염증이나 소화기 계통에 탈이 나지 않도록 꼬부라진 우유병과 비슷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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