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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수신 Oct 03. 2018

Life is beautiful because ...

... everything is useful

며칠 전 상해의 동화대학교에서 워크샵을 진행했습니다. 동화대학교는 패션과 텍스타일 디자인으로 중국에서 단연 1위로 꼽는 대학교입니다. 물론 다른 디자인 전공도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제 워크숍은 산업디자인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다른 학과 학생들 에게도 열려 있었다 보니, 패션 디자인 등 타 과 학생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 중 특이하게도 디자인이 아닌, Art Theory를 전공하는 학생도 참석했습니다.


워크샵의 주제는 성공적인 제품 디자인의 개발 방법을 익히는 것으로, 노인들의 삶에 도움을 주는 디자인을 개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디자인 과정 중에서도 특히 제대로 된 컨셉트를 개발하고 다듬는 내용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이 워크샵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내용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3일간의 빡빡한 워크샵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 있는데, 한 학생에게서 WeChat연락을 받았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저녁에 방문해도 좋으냐는 거지요. 짜이라는 이름의 이 학생은 앞에 이야기한 비디자인 전공 학생입니다. 신기했습니다. 3일 동안 전공도 아닌 내용을 가지고 오전 오후, 그리고 저녁에까지 머리를 짜냈는데 또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겁니다. 이 학생은 워크샵 내내 다른 디자인 전공 학생들 보다도 열심히 참여하고 영어로 의사소통도 잘 했던 학생이어서 눈에 띄었었습니다. 그래서 와도 좋다고 했지요.


저녁 9시에 호텔 로비에 앉아서 커피 한잔 씩을 놓고 이야기를 합니다. 제 워크샵이 자신이 처음으로 들은 디자인 강의, 실습이었다는 겁니다. 당연히 여러 가지가 궁금했는데, 다행히도 게 강의 스타일이 딱딱하지 않고 오히려 흥미를 불러일으켜주어서 재미있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짜이는 학부 때는 산동 지역에서 경영을 공부하고, 대학원 공부를 위해 상해로 유학을 와서 첫 학기를 막 시작했다고 하는데, 앞으로 갈 길도 멀고 또 지금까지 공부한 것과 또 지금 공부하는 전공이 어떻게 쓰일 지도 알 수 없으니 장래에 대한 생각이 많다고 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듣다가 제 이야기를 해 주게 되었지요. 물론 워크샵을 시작할 때 내 소개를 해서 대략을 알고 있겠지만 다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제 소개에 사용하는 슬라이드입니다.



세계 지도가 그려져 있으니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별거 아닙니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려니 이렇게 하는 것이 시각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에 지도를 사용한 것뿐이지요.


저는 지금은 사라진 학제인 5년 과정의 공업고등전문학교, 국립경기고등전문학교의 공예과에서 산업디자인을 비롯한 여러 가지의 디자인과 공예를 배웠습니다. 1978년 졸업과 동시에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한자동차에 중학생 때부터의 꿈이었던 자동차 디자이너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자동차 디자인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다 보니 혼자서 시간만 나면 자동차를 그렸었는데, 정말로 운이 좋게 GM 산하 회사였던 새한자동차에서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겁니다. 당시는 자동차 디자인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어서, 디자인을 배울 선배 직원도 없었습니다. GM도 새한자동차가 독자적인 자동차를 만들기 원하지 않았을 때이니 하던 일은 주로 외국에서 만들어진 모델을 한국 실정에 맞게 부분적으로 변경하는 일 정도였지요.


결국 8년 후인 1986년에 기아자동차로 이직을 하게 됩니다. 1년 여 후, 마즈다 등의 외국 자동차의 생산만을 하던 기아자동차가 야심 차게 고유모델을 개발할 계획을 세우게 되고, 그 담당자로 제가 정해집니다. 당시 기아자동차에 디자이너는 꽤 여럿 있었지만, 자동차 디자인 경험은 제가 가장 많았고, 또 TOEIC 점수도 제가 가장 높았기 때문일 겁니다. 담당자라고 해도, 처음 맡겨진 일은 외국 디자인 용역사의 디자인 진행을 관리하는 일만 맞겨졌었는데, 이는 한국 디자이너들은 아직 수준이 낮다는 당시의 인식 때문입니다. 영국, 미국, 이태리의 용역사를 관리하는 일 외에도 후배 직원 한 명과 디자인 작업도 병행해서 진행했는데, 1년 정도 걸린 한국과 미국에서의 여러 단계의 평가를 거치면서 예상을 뒤엎고 내가 한 디자인이 선택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기아 세피아는 기아자동차의 고유모델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독자모델이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후속 차종들이 기아자동차의 디자이너들 손에 의해 만들어지게 되고, 저의 세피아와 거의 동시에 SUV의 역사를 열었다고도 할 수 있는 스포티지의 디자인을 개발하게 되고, 그 마무리를 세피아를 같이 진행하던 후배 디자이너에게 맡기게 됩니다. 세피아 개발 종료 후 여국 Royal College of Art에서 운송기기 디자인을 전공하고 돌아와서는 국내 승용형 미니밴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카니발의 내 외장 디자인을 개발하게 되고, 이 외에도 소형, 중형 트럭 등 다양한 자동차의 디자인들을 정신없이 많이 개발하게 됩니다. 소위 자동차 디자인계에서 잘 나가는 디자이너가 된 거지요.


기아자동차에서 일한 지 10년째인 1995년, 갑자기 사무용 시스템 가구를 만드는 퍼시스로 옮기게 됩니다. 이때가 제 커리어에서 말도 안 되는 결정을 한 첫 번째입니다. 당연히 주변의 친구들도 제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니냐고 했지요.


제품 디자인 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높낮이가 있습니다. 예를 자동차 디자인은 가구 디자인에 비해 어쩐지 더 어렵고, 더 중요하고, 더 멋있어 보이는 것 같은 겁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자동차든, 가구든, 장난감이든, 주제는 사람이고, 사람들의 만족을 위한 거라면 어려움, 중요함의 정도는 같다는 거지요. 


이후 5년간 퍼시스에서, 또 퍼시스에서 분사해서 창업한 일룸에서 시스템 가구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처음에는 디자인 조직을, 나중에는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을 합친 조직의 중역인 연구소장으로 일하면서 여러 가지 종류의 가구, 의자 등을 개발하고, 인천공항의 터미널 의자도 개발하는 등 많은 일을 했습니다. 단순히 가구 디자이너로서가 아니라, 자동차 디자인에 사용되는 방법론을 적용하니 다른 회사들이 만들지 못하는 디자인들도 종종 개발할 수 있었고, 또 자동차 디자인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공간감, 문제 해결의 접근 방식을 많이 다를 수 있어서 회사에게도 또 저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퍼시스와 일룸에서 만드는 가구들은 디자인과 품질 측면에서는 최고 수준이었으니, 이러한 제품을 개발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1999년 가을. 어린 아들과 내가 디자인한 세피아. 창문에는 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던 일룸의 로고.


퍼시스 / 일룸에서 일한 지 5년이 되는 2000년, 느닷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 대학원생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합니다. 제 커리어에서 말도 안 되는 결정을 한 두 번째입니다. 친구들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40대 초반, 한참 사회에서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있는 중간에 사다리에서 내려온 것을 이해하기란 어렵지요. 퍼시스같이 동종 업계에서는 1위를 하는 탄탄한 중견기업에서 중역으로 일 하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것은 아주 희귀한 경우이니까요. 


하지만 영국에서의 디자인 교육을 경험한 저는 미국의 디자인 접근 방법이 궁금하기도 했고, 퍼시스에 초청했던 오하이오 주립대의 라인하트 교수의 본질적인 문제를 들여다보는 시각이 좋아 보였으며, 단명한 한국의 기업에서 사다리를 타는 것에 대한 별 기대도 없어서 그런 말도 되지 않는 결정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으로의 이민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고, 한 2년 정도 공부를 하고 돌아올 생각이었습니다.


2000년 9월, 가지고 있던 아파트도 팔고, 이민 가방 몇 개를 들고 저와 식구들은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2년 후에 돌아올 거면서 아파트를 왜 팔았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입니다. 송파에 있는 그 아파트가 지금도 있다면...


43살에 새로 시작한 공부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인클루시브 디자인을 주제로 한 논문을 쓰기로 하고 공부를 하던 차에 내 담당 교수가 미국의 유명한 발명가인 Dean Kamen을 초청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눈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 이듬해 여름 Dean Kamen의 회사인 DEKA에서 인턴을 하게 됩니다. DEKA는 첨단 기술을 적용한 새로운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하는 회사인데, 마침 개발하던 것이 계단을 오르내리고 또 두 바퀴로 일어서기도 하는 전동 휠체어였습니다. 인턴을 위해 보낸 포트폴리오에서 운송기기 디자인과 의자 디자인들을 본 Dean은 두말하지 않고 내가 최적임자라고 본 거지요. 서로 별로 상관없다고 볼 수도 있는 자동차와 가구 디자인을 했던 것이 DEKA에서 하게 되는 일에는 최적이었던 겁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짜이에게 Life is beautiful because everything is useful이라고 했었습니다. 이 글의 제목이 된 말입니다. 짜이가 이 전에 했던 일, 공부했던 것이 별 쓸모가 없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길래 해 준 말입니다. 무심결에 말하고 나니 라임이 딱 맞아떨어지기도 해서 서로 마주 보고 웃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돌아온 후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WeChat으로 물어봤더니 곧바로 다시 이야기해 주더군요. 인상에 남았던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인턴으로 시작했지만, 학교에 돌아가지 말고 정직원으로 남으라는 제안을 받아들여서 DEKA에서 일하게 됩니다. 이 곳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전동휠체어 iBot의 2세대 디자인을 개발하고, 또 이전에는 없던 디자인 조직을 만들어서 디자인 디렉터로 일을 하게 됩니다. 2001년에 한화로 1억이 훨씬 넘는 연봉을 받았고, 또 뉴햄프셔주는 연방 소득세 외에는 다른 세금도 없고, 심지어 sales tax도 없으니 꽤 살기 좋은 곳입니다. 


계단 기능을 시연중인 iBot


이렇게 잘 지내다가 2003년 여름에 또 느닷없이 말도 안 되는 세 번째 결정을 하게 됩니다.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대학교에 교수직으로 옮기게 되는 겁니다. 평소에 교수직에는 전혀 마음이 없었지만, 기아자동차와 퍼시스 재직 중에는 여러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었습니다. 신시내티 대학교의 디자인 학부는 미국 내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좋은 학교이지만, 당시에는 잘 알지 못하고 있었었습니다. 그러다가 화장실에 갈 때 집어 든 디자인 잡지에서 본 교수 초빙 광고가 이상하게 눈길을 끌게 되고, 이미 지원서 마감이 지난 시점이었는데도 인터뷰 초청을 받아서, 방문한 대학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30여 명 가까운 지원자들이 있었고, 최종적으로 오퍼를 받기는 했지만, 문제는 DEKA 연봉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연봉이었습니다. 원래 대학은 기업에 비해 연봉이 낮고, 또 주립대학교이니 더 낮은 거지요. 하지만 큰 고민 없이 신시내티 대학교로 옮겨서 교육자로의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하게 됩니다. DEKA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동료 한 명은 대학이라는 곳이 편협되고 고집 세고 또 속이 좁은 사람들이 많은 곳인데 왜 그런 곳으로 반토막 연봉을 감수하고 가느냐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신시내티 대학교의 산업디자인 학과는 제품 디자인과 운송기기 디자인, 두 개의 전공이 있는데, 지원한 사람들 중 유일하게 제가 이 두 가지를 다 경험한 사람이었던 겁니다. 역시 Life is beautiful because everything is useful인 거지요.


신시내티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강의 후


신시내티에서 여러 가지를 가르치고, 연구하고 하면서 디자인에 대해 완전히 새롭게 배운 셈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자동차, 가구 등등을 디자인하고, 대부분의 디자인들이 성공적이 되면서 나름 성공한 디자이너의 모습으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디자인에 대한 개념이 새로이 정립된 것은 신시내티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부터입니다. 처음에는 부교수로 시작해서 몇 년을 보내고, 종신교수 타이틀도 받고, 또 산업디자인 학과장 제안을 받아서 학과장으로 또 몇 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공석이 된 디자인 학부장을 초빙하는 공개 모집에 지원을 했습니다. 이게 말도 안 되는 결정 네 번째입니다. 신시내티 대학의 디자인 학부는 학생만 1200명 정도로, 원만한 단과대학의 규모와 맞먹습니다. 따라서 이 학부장 역할은 다른 단과대 학장 자리만큼 골치 아픈 문젯거리도 많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니 다른 동료 교수들이 왜 이런 자리에 지원하느냐라는 겁니다. 게다가 초빙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교수는 자신이 예전에 다른 대학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을 데려오기 위해서 온갖 힘을 다 쓰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제 뜻은 간단하였습니다. 어려운 일을 해 봐야 근력이 생기고 성장을 한다라는 거지요. 최종 3명을 평가하는 인터뷰와 특강 등의 단계를 거치고 제가 학부장으로 선임이 되었습니다. 처음 대학으로 올 때는 생각도 하지 않은 일이었는데, 약 6년 후에 180명이 넘는 전임, 겸임 교수들을 이끄는 일을 하게 된 겁니다. 역시 일도 많고 머리 썩힐 일도 많더군요.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연봉이 예전 DEKA에서 계속 있었을 때의 연봉과 같아진 겁니다. 


이 와중에 다섯 번째의 말도 안 되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미국 산업디자이너 협회 IDSA의 교육담당 부회장에 지원한 겁니다. IDSA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산업디자이너협회입니다. 이 협회의 회장단에는 '당연히' 미국인이 주를 이룹니다. 이따금 영국 출신으로 미국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들이 회장단에 포함되기도 합니다.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은 회장단에 포함된 적이 없구요. 회장단은 회장, 교육담당 부회장, 각 지역 담당 디렉터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회원 전체의 투표를 통해서 선출되고 임기는 2년입니다. 회장단에서 일하는 것은 일은 꽤 많지만 무보수 직입니다. 따라서 지원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원할 때에는 세명이 경합을 하게 되었는데, 한 달간 이루어진 선거에서 제가 선출이 되었습니다. 


부회장에 지원한 것이 왜 말도 안 되는 결정인가하면 저는 이미 학부장으로 일이 넘쳐날 때이었거든요. 하지만 저의 생각은 언제나 같습니다 - 도전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 부회장으로 2년간 봉사하는 동안 미국 산업디자인계에서 저의 위상이 달라졌습니다. 출세를 했다는 뜻이 아니라, 역할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안팎으로 바쁘게 지내던 2013년 가을, 어느 헤드 헌터로부터 이메일을 받습니다. 디트로이트에 있는 디자인 대학인 CCS에서 부총장을 초빙하는데 관심이 있느냐는 거지요.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했다가 두어 번의 인터뷰를 거쳐서 결국 CCS에 Provost 및 부총장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게 저의 말도 안 되는 결정 여섯 번째입니다. 동료들은 더 높은 연봉, 더 높은 타이틀 때문에 옮기느냐고 했지만, 제 대답은 더 큰 도전을 찾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연봉도 여러 배 오르고 타이틀도 더 좋아지기는 했지만, 내 성장을 위한 도전이 없는 곳이라면 가치 없는 일이지요. 어떤 동료들은 왜 종신교수직을 버리고 가느냐고 했지만, 제 대답은 대학에서 쓸모가 있는 교수라면 종신교수직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지요. 왜 하필 디트로이트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것과 같은 그런 험해 보이는 곳)로 가느냐라는 질문에는 디트로이트야말로 예전에 미국이 표방하던 Land of opportunity라는 답을 해 주었습니다.


CCS에서 저를 원했던 이유는 교수, 학과장, 학부장 등을 고루 경험하고, 26년 정도의 다양한 디자인 경험이 있으며, 특히 자동차 디자인에 경험이 많다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CCS는 자동차 디자인으로 널리 알려진 학교이니만큼 대학을 대내, 대외로 대표해야 하는 부총장으로서 적임자라고 본 것입니다. 게다가 신시내티 대학교 교수 시절 여러 나라에 학회로, 대학 방문으로 뻔질나게 드나든 것도 CCS의 국제적인 성장에 도음이 된다고 본 거구요. 다시 한번 Life is beautiful because everything is useful이 입증된 겁니다.


이렇게 시작한 CCS에서의 일은 즐거웠습니다. 일도 많고, 출장도 많고, 신경 쓸 일도 많지만 큰 보람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인지도가 높은 대학을 대표한다는 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즐거운 일입니다. 독일, 프랑스, 중국, 일본, 오스트리아 등의 유수한 대학들과 교류 프로그램도 개발하고, 대학 내 교수들의 개발도 지원하고, 전 대학 커리큘럼도 재 정비하고, 디자인 혁신 센터도 만들고, 정말로 많은 일을 했습니다. 매일 CCS 색이기도 하고, 제가 좋아하는 색이기도 한 노란색 보타이를 하고 다녀서 노란색 보타이가 제 심벌이 될 정도였습니다.


칠레 마요르 대학에서의 키노트 후


올해 2018년 1월에 CCS를 떠나서 The Modus Design이라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로 한 것은 말도 안 되는 결정 일곱 번째입니다. CCS에 올 때의 타이틀이 부총장이라고 하니까 다들 맨날 이상한 결정만 하더니 이제야말로 '출세'했다고 부러워 했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더 큰 타이틀은 출세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더 큰 도전입니다. 그러니 CCS의 부총장직을 그만둔 것은 출세를 그만둔 것이 아니라, 다른 도전을 찾기 위한 겁니다. 그 다른 도전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적을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 자랑이나 소개가 아닙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Life is beautiful because everything is useful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당장 별 쓸모없어 보이더라도, 언젠가 어디선가 쓰일 일이 있으니 뭐가 되는 열심히 하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이게 단순히 제 생각이 아니라 성경에도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영어로는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added to you" 한글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는 이 성구는 제가 일상적이거나 커리어와 같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가장 많이 생각하는 가이드라인 같은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의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나 "그의 나라의 의"는 물론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일이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니, 이 내용을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을 하면 나머지 것들은 자동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클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타이틀, 연봉 등의 'all these things"를 따를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따라 즐겁게, 열심히 하다 보면 내가 원하던 것들은 자동적으로 다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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