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읽씹에 상처받지 않기 위한 고민
나는 영국에서 산 지 8년차이다.
이전 글에서 쓴 바와 같이 영국인은 한국에 비해 답장하는 속도가 정말 느리다.
이제 느린 것은 이해한다. 보통 일주일 내에는 답이 온다. 하지만 영원히 내게 답장을 보내지 않는 것에는 여전히 긁힌다. 유독 이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보니, 누군가 답을 보내지 않으면 훨씬 욱씬거리며 아파한다.
이런 걸로 상처를 받는 내가 너무 힘들었다.
요즘 특히 계속 집에 있다보니 생각을 쉽게 전환하지 못했다.
영국에서 읽씹을 하도 많이 겪다보니 이것에 좀 무뎌질 때가 됐다고 생각하다가도
돌연 열이 확 받는다.
계속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읽씹에 민감한가?
읽씹하면 상대가 나를 무시한다고 느껴졌다.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다.
오은영박사님 프로그램을 많이 보는데 최근 본 에피소드에서 아이가 반응을 원하는데 엄마는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아이는 더 크게 울음을 터뜨리고 절망했다. 갑자기 내 어린시절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유년시절에 우리 엄마, 아빠도 반응을 안 보인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아빠는 요즘에도 여전히 대답을 안 할 때가 많아서 대답할 때까지 아빠를 부를 때가 많다. 근데 엄마도 생각해보면 반응을 안 할 때가 종종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집에 있으면 더 관종이 되는 것 같다. 엄마, 아빠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더 큰 소리로 과장해서 행동한다. 갑자기 몸을 마구 흔들어서 춤을 추기도 한다. 웃지 않으면 웃을 때까지 춘다.
이런 경험 탓에 외부에서 누가 내게 반응을 크게 보이지 않으면 유독 상처를 받고 화가 나는 것 같다.
반면 내 남편은 나에 비해 무던한 편이다. 그는 읽씹에 나만큼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고 심지어 까먹고 있다.
그는 주부인 어머님 밑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잘 큰 것 같다. 나는 맞벌이가정에서 태어나서 좀더 애정결핍이 있는 것 같다.
그건 그렇다 치고, 도대체 이 영국것들은 대체 언제 답장을 하는 거야? 친해질 수는 있는 거야?
구글로 검색까지 했다. 'Why British people don't reply?'
별다른 확답은 찾지 못했으나, 고스팅과 관련된 글을 읽게 되었다.
서구권에서는 언제부턴가 데이트 상대가 문자에 답장하지 않고 사라진 것을 두고 유령처럼 사라졌다고 해서 'Ghosting'이란 용어가 생겼다.
요즘 젊은 세대, 특히 z세대부터는 이미 디지털인 시대에 태어났다. 그러니 핸드폰으로 쉴새없이 알림이 뜨는 것에 익숙하다. 답을 하는 게 피곤해질 만하다. 사실 고스팅은 데이트 상대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계에서 일어난다. 나도 답을 느리게 할 때가 많으니까.
저자는 고스팅은 상대가 딱히 보낸 이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번아웃이 심해서, 너무 우울해서 답장을 못 하게 된다고. 고스팅(읽씹)이 꼭 거절의 의미는 아니라고 했다.
그 글을 읽으니 살짝 치유가 됐다. 흠 그래... 상대가 나한테 화나서 씹은 게 아니라 너무 바쁘거나, 심적으로 답을 할 여유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최근에 한 3명에게 읽씹을 당해서 너무 불쾌했는데 저 글을 읽고 나서는 계속 나 자신에게 말했다.
'너가 아니라 그 아이의 문제일 거야. 괜찮아 괜찮아. 넌 너 그대로 괜찮아. 부정당한 게 아니야. 여기 내가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니까 괜찮아.'
그리고는 오늘 다시 용기 내서 그들에게 한 번 더 연락을 했다.
그러니까 연락이 또 바로 왔다.
흠...!
결국엔 이 예민하고 망상기 가득한 내 성격이 나 자신을 힘들게 한 것 같다.
아무렇지 않게 한 번 더 문자를 보내면 될 일이었을지도.
뭐 어쨌든 이런 고민을 통해 한 걸음 더 읽씹 문화에 익숙해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