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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킴 May 13. 2022

영국에서 지나친 배려는 무례할 수도...

영국생활 에세이 004

 당신이 젓가락질을 한창 배우는 중이다. 그때 당신의 젓가락질이 서툰 걸 보고 누군가가 반찬을 대신 집어서 밥 위에 올려준다면 기분이 어떨까? 


 첫 번째 직장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영국에 온지 1년밖에 되지 않아서 여전히 영어 실력이 좋지 않았다. 어느 날 밤, 당시 동료 루도비카와 그녀의 남자친구 댄과 함께 펍에서 술을 마셨다. 보통 펍에서는 여러 소음이 섞여서 영어를 알아듣는 게 더 힘들다. 루도비카는 자그마한 덩치에 조막만한 얼굴을 가졌지만 사자갈기처럼 풍성한 곱슬머리에, 뿔테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이 강렬한 이탈리아인이었다. 영국인인 줄 알 정도로 영어를 잘 했지만, 날 위해 일부러 느리게 말해주고, 내 서툰 영어를 잘 들어줘서 그녀와 대화하는 게 가장 편했다. 이런 그녀 덕분에 펍에서도 별 부담 없이 재밌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루도비카는 내게 “혹시 내가 네게 영어로 천천히 말하는 게 기분이 나빠?”라고 물었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고마워 죽겠는데? “전혀! 왜?” 나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러자 루도비카는 어젯밤 집에 돌아가서 남자친구와 다퉜다고 한다. 댄은 “너는 왜 수수한테 그렇게 천천히 말을 해?”라고 하며 의문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영국인인 댄의 눈에는 루도비카가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뉘앙스였다. 그 당시에는 이 의견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내게 천천히 말해주는 루도비카에게 무조건 고마울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두 번째 직장을 다닐 때였다. 회의에 참여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첫 직장과 달리 두 번째 직장에서는 회의할 기회가 많았다. 영국인 한 명과는 괜찮은데 여러 명과 동시에 대화를 나눠야 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다. 이해도 못했는데 내 의견까지 말해야 할 때면 땀이 뻘뻘 났다. 자유롭고 느슨한 분위기인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늘 혼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다섯 명이 모여 영상 콘텐츠 관련 회의를 한 날이었다. 그 중엔 기획하는 니키와 촬영하는 조단이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조단과 나는 비디오팀 부서로 돌아왔다. 조단은 의자바퀴를 드르륵 굴리면서 내 옆으로 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까 회의에서 니키가 자꾸 너 대신 말해서 너무 짜증났어. 왜 네가 말할 수도 있는 걸 걔가 말한대?”

머릿속에 물음표가 번쩍 떠올랐다. ‘그게 왜? 나 대신 영어로 유창하게 말해줘서 난 무척 좋았구만.’ 귀여운 연하남 조단이 날 생각했다니. 설레는 마음 한편으로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던 내 ‘권리’가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영국인들이 내게 영어로 천천히 말한 적이 거의 없었다. 내가 못 알아들으면 여전히 같은 속도로 똑같이 말해주었다. 영국인 눈엔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천천히 말해주는 게, 영어가 유창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대신 말해주는 게 오히려 상대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여기는 듯했다. 마치 내 능력을 존중하지 않고 ‘수수는 영어를 못하니까 천천히 말해줘야 해’, ‘내가 대신 말해줄게’라고 오해를 사지 않으려 애쓴다는 느낌이랄까. 이를 경험하고 난 후 나 역시 영국인을 대할 때 그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물론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말이다.


 우리나라는 누군가를 배려한답시고 그 사람을 위해 다 해주는 경우가 많다. 엄마가 운동화를 서툴게 신는 아이를 위해 직접 아이 신을 신겨주거나 아이의 머리를 대신 감겨준다. 하물며 엄마가 아이 숙제까지 대신 해주고 대회에 나갈 시까지 대신 써주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 본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오은영 박사는 아이를 기를 때 아이 스스로 하게 해주고, 뭔가를 하기 전 아이의 의사를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유태인의 격언에도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주는 것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게 더 현명하다는 말이 있다. 자율성을 사랑하는 나로서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당시 나는 내 자신이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이었던 점에 감사했다. 영어가 서투른 탓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친다는 미안함이 내게 있었다. 누군가가 느리게 말해준 덕에 그들의 영어를 이해할 수 있었고, 때론 나 대신 말해줘서 당황스러운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 난 그저 고마웠다. 모든 걸 ‘빨리빨리’ 해결하려는 한국 특유의 문화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느리면 타인에게 피해가 될 터이니, 느린 나 대신 남이 빠르게 처리해주는 게 배려라고 여겼던 게 아닐까. ‘빨리빨리’ 문화가 없는 영국인 눈에서는 이게 다르게 여겨졌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느리더라도 기다려주는 일이 많아지면 ‘배려’의 정의가 달라지려나? 문화에 따라 이렇게 배려의 기준도 다를 수가 있다는 게 참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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