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데이팅앱을 한다면 마주할 사실
“요즘 우리 반에서 핫한 거 알려줄까?”
2014년 초, 같이 살던 한국인 언니의 친구 민희가 우리집에 놀러 왔을 때였다. 민희는 런던에서 명문패션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영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그녀의 말에 귀를 쫑긋했다. 민희네 학교친구들은 요즘 ‘틴더’라는 데이팅앱을 하며 논다고 하였다.
틴더는 디자인이 직관적이어서 사용하기 쉬웠다. 앱을 켜면 데이트할 상대의 사진이 한 장 뜬다. 그 사람이 맘에 들면 오른쪽으로, 맘에 들지 않으면 왼쪽으로 넘긴다. 한 사람의 프로필 사진을 넘길 때마다 다음 사람 사진이 바로 뜬다. 다음, 다음, 다음... 상대를 1초도 안 되는 사이 판단하고 엄지손가락을 좌우로 휙휙 움직인다. 내가 오른쪽으로 넘긴 상대가 내 사진도 오른쪽으로 넘겼다면 매치! 매치가 되면 서로 메시지를 나눌 수 있다. 간단한 방식으로 데이트를 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틴더는 한창 뜨고 있었다. 마침 아무런 인맥도 없던 내게 딱이었다. 게다가 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좋은 방법이 그 나라 사람과 연애를 하는 거라고 하지 않던가!
그때부터 틴더를 포함하여 여러 데이팅 앱을 쓰기 시작했다. 그 세계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남자를 만났다. 이렇게만 들으면 내가 엄청난 바람둥이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데이팅 앱은 간편한 만큼 만남이 짧게 끝나는 경우가 다반사다. 데이팅 앱이 대중화되면서 서구권에서는 ‘고스팅’이란 용어까지 생겼다. 고스팅(ghosting)이란 ‘ghost’, 즉 우리말로 ‘유령처럼 사라진다’는 뜻으로, 데이트 상대가 갑자기 아무 설명 없이 연락 두절이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잠수 탔다’고 하는 바로 그 무례한 태도를 일컫는다. 데이팅 앱에서 만난 남자들은 냉동고보다 차가울 정도로 매너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데이팅앱에 너 말고도 다른 여자는 차고 넘친다.’는 인식이 커서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는 경우가 적기 때문이다.
나의 첫 번째 하트 브레이커는 조지였다. 조지는 190cm로 키가 훤칠했고, 미소년 같은 얼굴에 옷까지 잘 입었다. 조근조근한 말투와 다정한 성격까지 모든 게 딱 내 취향이었다. 그런데 데이트를 세 번 한 이후부터 약속 당일 나오지 못하겠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세 번째. 참고 있던 화가 폭발했다. '이렇게 하면 곤란하다, 벌써 몇 번째 취소냐'라는 내용의 문자를 길게 보냈다. 몇 분 뒤 쿵쿵 뛰는 심장으로 메시지창을 확인했다. 내 문자는 선명하게 ‘읽음’ 표시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그에게서 어떠한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것이 나의 첫 번째 고스팅 경험이었다. 그가 나를 좋아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확실하게 끝맺음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관계를 뿌옇게 만든 그의 태도에 화가 났다. 처음 겪은 고스팅의 상처로 내 마음은 몇 개월 동안 불에 덴 듯 욱신거렸다.
이런 일은 7년 동안 셀 수 없이 이어졌다. 알콩달콩 문자를 주고받으며 한 달이나 기다렸던 크리스토퍼는 약속 당일 아침 갑자기 약속을 취소했다. 데이트를 하는 동안 온갖 달콤한 말을 던지던 제임스는 내가 보낸 문자를 야무지게 씹어먹었다. 영국 남자들은 다 이런 걸까. 나와 정서가 맞는 동양인도 만나봤다. 하지만 일본 남자도 첫 데이트 후 내 문자를 씹었고 한국 남자까지 당일 취소를 했다.
국적을 불문하고 데이팅 앱에서 만난 남자들은 이토록 매너가 없었다. 상대와의 관계가 짧게 끝나면서 마음에 생채기가 하나씩 생겼다. 생채기 하나는 잠깐 아팠지만 그런 생채기가 겹겹이 쌓이다보니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사실 나 역시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 적이 많다. 그 사람이 별로 맘에 들지 않더라도 끈기있게 데이트를 좀더 해봐야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나를 좋아하는 만큼 내가 많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것에 죄책감이 생겼다. 그러면 내 선에서 짧게 끝내버렸다. 결국 상처 받아서 아프고, 상처 줘서 미안한 감정에 지쳐서 데이팅 앱을 모조리 삭제했다. 오프라인에서 사람을 만나보려 했지만 숙맥이라 실생활에서는 이성에게 말을 걸지도 못했다. 결국 외로워진 내 마음은 다시 데이팅 앱으로 향했다.
하나 더 혼란스러웠던 건 영국(서구권)의 관계 유형이었다. 우리나라처럼 데이트를 몇 번하고 바로 사귀는 게 아니라, 사귄다는 얘기 없이 3개월에서 1년까지 애매하게 데이트만 계속 하는 경우가 많다. 이름하여 ‘Grey zone’. 깔끔하게 정의 내리지 않고 흰색과 검정 그 사이의 관계로 유지되는 경우를 일컫는다. 잠만 자는 관계인 ‘캐주얼한 관계(Casual relationship)’도 흔하다. 우리나라처럼 정식으로 관계에 정의를 내리는 일이 드물다. 잠만 자는 건지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건지 알쏭달쏭할 때가 많다. 친구에게 상대를 설명할 때 ‘얜 내 여자친구야/ 남자친구야’ 라고 말하는 걸 듣고서야 연인이라는 걸 확인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정의 내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더 세련된 걸 수도 있지만 여전히 내 입장에서는 이런 방식이 비겁한 것처럼 보인다.
신기한 건 내 주변 친구들은 대부분 데이팅 앱을 통해 연인을 만나고 결혼까지 했다는 것이다. 한때는 ‘왜 나만 이렇게 잘 안 풀리는 걸까?’ 한탄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내 성격 탓이다. 연인을 만난 친구들은 대부분 아무 기대를 하지 않았다. 무례한 사람들을 여럿 만나도 끈기를 가지고 계속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이성에 대한 기준도 구체적이지 않았고 느슨한 편이었다. 반대로 나는 ‘모 아니면 도’인 성격이다. 상대가 마음에 안 들면 더 만나지 않는다. 이성을 보는 기준도 까다롭고 한 번 사랑에 빠지면 빠져 나오기 힘들다. 게다가 혼자 지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데이트 상대가 없어도 혼자나 친구들과 즐겁게 시간을 잘 보낸다.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싱글이라는 사실에 자꾸만 자존감이 낮아졌다.
내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인가?
이 사회는 왜 커플 중심으로 돌아가고
싱글인 사람은 왜 이렇게 압박감을 느껴야 하는 거지?
한국에 와서 혼자 살고 비혼주의자에 싱글인 사람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영국만큼 커플 중심은 아닌 것 같아서 안심이다. 이런 면에서 오히려 영국보다 더 앞서가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아. 저출산이 되니까 퇴보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요즘엔 한국에서도 데이팅 앱으로 연인을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다행히 한국은 영국처럼 고스팅을 하거나 약속을 어기는 비율이 현저히 낮다. 데이트를 하며 깊이를 쌓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참고로 다섯번만 만나도 영국에서 겪었던 것보다 훨씬 오래 만난 거다!)
데이트 상대를 만나기는 참 쉬워진 반면 끝맺기는 더 어려워진 요즘이다. 오랜 경험 끝에 배운 점은 데이트를 하건 안 하건 언제나 내 마음을 정성스레 돌보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흐지부지하게 끝낸다고 나까지 덩달아 살금살금 도망가는 건 그만두었다. 상대와 그만 만날 거면 용기 내서 끝을 맺을 것이다. 이런 매너를 몸에 새겨놔야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설령 혼자 지낸다 해도 훨씬 더 성숙한 내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외로워지기 쉬운 요즘 사회, 데이팅 어플을 쓴다면 마음 단단히 먹자!
혹시 런던에 살 예정이신가요?
<런던 생생정보통> 한 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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