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수킴 Mar 08. 2022

우리집 창문이 떨어졌다

가짜 창문으로 10개월 살았던 썰

때는 2017년 11월, 전에 살던 집에서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새 집을 찾고 있었다. 내 마음은 사막처럼 척박해져 있었다. 제발 다음 집은 내가 안락하게 쉴 수 있는 곳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다행히 새로 찾은 집은 마음에 쏙 들었다. 이 동네 달스턴에 오래 살았는데도 이렇게 멋진 건물이 역 가까이 있는 줄 몰랐다. 달스턴 정션역에서 나와 조금만 걷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마법 학교같이 생긴 이곳이 나타났다. 창고였던 건물을 5층 아파트로 개조한 곳으로 아치형 입구에 노란 벽돌, 거대한 창문이 웅장하고 매력적이었다. 1층에는 믿음직스러운 할아버지가 경비원으로 계시며 택배도 받아주셨다. 매력적인 이스트 런던 분위기가 물씬 나는 이곳에서의 삶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사 온 지 2주가 지난 일요일 아침이었다. 친구와 밤새 동네 바와 클럽을 다니며 신나게 놀고 난 다음 날 아침이었다. 친구는 화장실에서 샤워 중이었다. 고풍스러운 창 너머로 맑고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철제 프레임이 원고지처럼 배열된 창문은 방 한 면을 채울 만큼 거대했다. 이 집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창문은 검은 손잡이를 직각으로 돌려서 앞으로 밀어야 열렸다. 낡아서 그런지 아주 세게 힘을 줘야 했다. 평소처럼 힘을 주고 창문을 확 밀었다.


그때였다. 창문을 고정하고 있던 경첩이 툭 부러지더니 내 몸이 한순간에 커다란 창문을 따라 앞으로 기울어졌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 상태로 몇 초 동안 멍하니 굳어있었다. 180cm정도의 창문이 내 오른손에 묵직하게 달려 있었다. 아니, 창문으로 무게중심이 쏠리면서 점점 내가 창문에 매달려갔다. 우리집은 3층이었다. 자칫하면 나까지 떨어질 것 같았다. 결국 마치 영화 ‘올드보이’에서 ‘우진’이 다리에서 떨어지려는 누나의 손을 놓아버리듯 창문을 놓아버렸다. 창문은 그대로 길거리에 떨어졌다. 와장창. 유리가 깨졌고 검정 프레임은 찌그러졌다.


마냥 햇살 좋았던 아침, 때 아닌 굉음이 평온한 일요일 아침의 적막을 깼다. 떨어진 창문을 멍하게 내려다보던 나는 멀리서 걸어오던 행인의 눈과 마주쳤다. 둘 다 ‘응? 이게 무슨 일이야?’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려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산산조각난 유리조각은 무심하게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친구는 화장실에서 나왔고 순식간에 발코니가 된 내 방에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길에 떨어진 내 방 창문(왼쪽) 그리고 휑하니 커튼만 남은 내 방 창가(오른쪽)


하우스메이트 한나의 방문을 두드렸다.


“한나!! 내 방 창문이 밖으로 떨어졌어!”

“아~ 하하 그래?”


그녀는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다시 옆방으로 옮겨 다른 하우스메이트 나오미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나오미는 내 방에 와서 창문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부동산에 바로 전화를 걸어주었다. 뒤늦게 한나도 내 방에 와서 휑해진 창가를 보고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Holy Shit! 창문 한 조각이 떨어진 게 아니었어?”


천만 다행인 건 창문이 떨어진 곳에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하마터면 얼떨결에 인생에 지울 수 없는 기록을 만들 뻔했다.


그날 오후 수리 업체가 왔다. 떨어져 나간 창문 크기에 맞는 나무판자를 임시로 붙여주었다. 안 그래도 이중창이 아니라서 이슬이 맺히고 곰팡이가 서렸는데 이참에 잘됐다고 생각했다. 마침 아파트 전체가 창문을 이중창으로 바꾸는 공사를 시작하려는 때였다. 


내 방 창문이 가장 마지막 순서라고는 했지만, 내 상황을 고려해서 내 창문을 먼저 해주겠지?
이참에 더 빨리 이중창으로 갈아서 더 깔끔해질 수 있겠어!


그건 크나큰 오산이었다. 부동산에서는 여러 복잡한 이유로 내 창문을 먼저 갈아줄 수 없다고 했다. 대신 월세를 깎아주겠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방에 유일한 창문이 막혀 있으니 환기를 시킬 수 없었다. 이메일로 문제를 제기했더니 그 판자에 미닫이식 작은 환기구를 만들어주었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환기구는 묘하게 눈 두 개와 입 하나의 위치로 뚫려서 더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주변 창문은 이슬방지용 비닐을 붙이느라 노란 테이프가 덕지덕지 달려있었다. 처음에 보았던 고풍스러운 창문은 어느덧 괴기한 괴물로 변해있었다.



첫번째 버전(왼쪽), 환기구 눈코입이 생긴 두번째 버전(오른쪽)


봄이 되었다. 펜팔친구라고 할 만큼 수십차례 연락을 오간 부동산 매니저에게 다시 한 번 이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주말은 잘 보내셨나요? 대체 제 창문은 언제 새로 달리는 걸까요?”


5월 초 드디어 창문이 생겼다. 하지만 고풍스러운 창문이 아닌, 떨어진 창문 크기에 딱 맞는 흰색 플라스틱 창문이었다. 철제프레임으로 된 원래의 창과 새로 달린 창문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기존 창문으로 바꾸려면 여전히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역시 유럽이다. 그래도 5개월만에 제대로 된 창문이 생겨서 숨이 좀 트였다. 부동산 매니저는 어쨌든 이제는 창문이 달린 거라며 깎아주던 월세를 정가로 올렸다.


흰색 플라스틱 창문이 달린 내 방(왼쪽), 창문쪽 클로즈업(오른쪽)


춥고 어두운 겨울에 떨어졌던 창문은 다음 해 낙엽 지는 가을이 되어서야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모든 이웃의 창문이 교체되고 나서야 우리집 차례가 된 것이다. 새 창문이 생기기까지 10개월이나 걸릴 줄 누가 알았을까. 기다렸던 시간에 비해 이중창으로 교체하는 데는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2개월 뒤 나는 이 집을 떠났다. 그곳에 산 건 딱 1년이었다.  



10개월 뒤 허무하리만큼 신속하게 교체된 창문




혹시 런던에 살 예정이신가요?

<런던 생생정보통> 한 번 읽어보세요!

https://kmong.com/self-marketing/552353/2DVS16Dh0C

매거진의 이전글 마이 네임 is '수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