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용 이름 짓기
내 실명엔 ‘슬’이 들어간다. 아무래도 '슬'은 영어가 모국어인 외국인이 발음하기에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떠나기 전에 영국에서 나를 소개하는 순간을 떠올려 봤다.
“안녕, 내 이름은 **슬이야.”
“*수을?”
“슬!”
“수을~”
“슬!”
분명히 ‘슬’ 부분에서 발음교정이 세네 번 오갈 것이고, 그렇다고 정확히 발음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영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니까... 이걸 몇 년 동안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진이 빠졌다. 결국 내가 편하기 위해 영국용 이름을 짓기로 결심했다. 근데 왠지 모르게 영어로 된 이름은 끌리지 않았다. 나와 맞지 않는 어색한 옷을 입는 느낌이랄까! 한글이지만 발음하기 쉬운 단어가 뭐가 있을까 몇 달간 고민했다. 본명을 그대로 살려 여러 이름을 만들어봤지만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수수하다’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수수라니! 사람들과 소탈하게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 내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친구들 반응도 좋았다. 발음하는 것도 재밌고 기억하기 쉬우니까 맘에 쏙 들었다. 철자는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SOO SOO’로 정했다. ‘SUSU’보다 시각적으로 더 안정감 있는 것 같아서.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그저 그래’라는 ‘so so’와 비슷하게 읽힐 때가 있을 것이라는 것... 그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진 않지만 이미 수십 번의 번복을 한 뒤라 단호하게 ‘수수’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2013년 가을 이후에 나를 알게 된 사람들은 나를 수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국친구들마저 나를 ‘수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태어나고 24년 뒤에 내게 새로운 이름이 생길 줄이야!
처음에는 사람들이 나를 부를 때 반드시 '수수'라고, '수'를 꼭 두 번 불렀으면 했다. 하지만 영국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한 번의 ‘수’가 이름으로 더 익숙할 뿐만 아니라, 부르거나 쓰기에 더 간단했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내 이름을 ‘수’로 줄여서 부르곤 했어. 그러면 외국에 흔한 이름 ‘Sue’로 느껴졌다. 그게 너무 싫었다. 흔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더 재미있다고. 한 번이 아니라 꼭 두 번으로 불러야 내가 의도한 의미가 된단 말이야!
사실 우리나라 풀네임은 길어봤자 4음절로, 다른 나라 이름들에 비해 아주 짧다. 한국인으로서 이런 줄인 이름을 쓰는 것에 낯설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영국에서는 풀네임이 굉장히 길기 때문에 서로 이름을 줄여 부르는 걸 좋아했다. 심지어 원래 이름으로 불리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예를 들면 ‘냇(Nat)’이라는 친구는 원래 이름인 ‘나탈리(Natalie)’라고 불리는 것을 극도로 어색해했고, ‘제임스(James)’라는 친구는 자신을 꼭 ‘지미(Jimmy)’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나 같은 경우는 그들과 반대로 ‘수’로 줄이지 말고 꼭 두 번 ‘수수’라고 부르라고 했으니 걔네 입장에서는 특이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 번은 두 번째 회사에 입사한 지 두 달도 안 됐을 때 나이 많으신 디렉터 중 한 분이 이메일로 내 이름을 ‘수’라고 부른 적이 있다. 그때는 정말 ‘수’라고 불리는 게 싫었다. 최대한 예의 바르게 답장을 보냈다.
“제 이름은 수가 아니라 ‘수수’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야 너 왜 그래...'하고 말릴 것 같은데 그땐 이상하게 사소한 것에 꺾이지 않는 마음이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분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끝내 답은 오지 않았다. 당황하셨던 걸까. 그때 유일한 한국인 동료였던 다희 언니가 이 얘길 듣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대체 ‘수’나 ‘수수’나 뭐가 그렇게 중요하니?"
그때 언니는 이미 영국생활을 한 지 이미 15년이 훌쩍 넘은 상태였다. 언니는 이름에 관해서 통달한 지 오래됐다고, 어떻게 불리는지에 대해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당연히 중요하지 언니는 왜 내가 문제인 것처럼 말할까?’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을 뿐이다.
수수라는 이름을 쓴 지 어언 8년이 지났다. 그동안 두 가지 심적 변화가 생겼다.
하나는 이제야 서서히 내 이름이 정확히 불려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회사에서 동료들이 텍스트로 내 이름을 언급할 때 힘들어하는 게 느껴졌다. 회사 메신저에서 다른 사람들은 Alex(Aelxander), Oli(Oliver), Gem(Gemma) 등 다 줄여진 이름이라 한 단어로 치면 되는데 유독 내 이름만 Soo Soo, 두 단어로 타이핑해야 했으니까. 한 회사에서 이 이름으로 5년 동안이나 근무했으니 동료들은 내 이름에 수백 번 더 수고한 셈이다. 친해진 동료 하나는 나중에 내 이름을 ‘SS’로 줄여서 부르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렇게 써줘서 고마웠다. 근무환경이 영국인 중심에 외국인이라곤 손에 꼽을 정도여서 내 이름이 항상 튀는 것 같았다. 한글로는 '수수', 한 단어지만, 영어로는 두 단어로 늘어난 데다가 스펠링까지 더 긴 걸 택한 결과였다. 이제야 의문이 들었다.
‘수수’는 진짜 내 이름도 아닌데 어떻게 쓰고 부르느냐가 그리 중요했던 걸까?
요즘에는 식당이나 마사지를 예약할 때 이름을 ‘Sue’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Sue’. 이제는 싫어했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흔해서’ 쓰는 게 좋아졌다. 심지어 매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얼마나 간단한가! 두 번이 아니라 한 번만 말하는 것. 철자도 남들에게 편한 걸로 하니 소통하기 훨씬 편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에고가 작아진 결과인 것 같기도 하다. 8년 전과 후의 나가 서로 마주하면 뒤집어질 일이다!
두 번째로, 나이가 들면서 ‘수수’라는 이름이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세월은 내게만 적용될 뿐, 이름은 결코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 어색해졌다. 영국에선 ‘수수’가 유아적인 느낌이 강했다. 영국 발음으로는 한 음절 한 음절 힘 있고 길게 발음해서 마치 강아지를 부르는 것 같다. ‘쑤우~! 쑤우~!’ 한 번은 스타벅스에서 주문을 할 때 점원이 내 이름을 듣고는 내 컵에 ‘츄츄(Chou Chou)’라고 잘못 적은 적도 있다. 알고 보니 ‘츄-! 츄-!’는 영국에서 기차 소리 표현할 때 쓰는 ‘칙칙폭폭’ 같은 의성어였다.
‘수수’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었을 때만 해도 내가 영국에서 이렇게 오래 머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 이름을 오래 쓰다 보니 ‘과연 앞으로도 영국에서 수수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게 괜찮을까?’ 의문이 들기 시작했어. 영어 이름 때문에 빚어지는 문제도 간혹 발생했다. 우체국에서 보관된 택배를 찾으려고 할 때 받는 사람 이름이 ‘Soo Soo’인데 내 신분증에 있는 이름은 다르다며 택배를 줄 수 없다고 한 적이 있다. 이런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장난처럼 들리는 ‘Soo Soo’라는 닉네임을 버리고 본명으로 생활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지만 여전히 '슬' 발음을 되풀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영주권까지 얻은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내 이름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고 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과연 내 이름을 뭐라고 소개하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