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4(푸엔테 라 레이나)

용서의 언덕 - 바람의 길과 별의 길이 만나는 곳

by 호변나그네

D+4 (10/12 Sun) Pamplona - Puente La Reina, 24Km

알베르게 퇴실 시간 관계로 8시에 짐을 챙겨 나왔다. 팜플로나 대성당에 들러 참배를 하고 싶었지만 10시 반에나 연다고 해서 포기. 내 아버지의 집은 언제나 “열린 문” 이면 좋으련만!

어젯밤 엄청난 인파로 들끓던 까스티요 광장(Plaza Del Castillo)은 아침부터 청소차량으로 분주하다. 다음에 다시 오게 된다면 헤밍웨이가 좋아했다는 여기 이루나 카페 (Cafe Iruña)에서 핀초 (Pincho = 해산물, 고기, 야채 등을 꼬치에 끼워 만든 한입 안주. 종류가 많은데 앤초비가 들어간 Gilda 가 유명)를 안주 삼아 와인 한잔 했으면 하는 마음. 이루나 (Iruña)는 이베리아 반도의 원주민 격인 바스크 (Vasco) 민족의 언어로 “도시”를 뜻하며 바로 그들의 첫 독립국인 팜플로나 왕국이 9세기경 여기 팜플로나를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오늘도 만만치 않은 거리를 걷는다. 순례길 전반부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용서의 언덕, 알토 델 페르돈(Alto del Perdón, 750m)까지는 13km의 쉼 없는 오르막길이다. 거기서 다시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 여왕의 다리)까지는 12km의 내리막. 그야말로 고행의 길이다.


9시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출발, 10시 반경 시수르 메노르(Cizur Menor; 5km 지점) 도착, 아직은 무난한 평지길이다. 가게에 들러 물을 보충, 저 위에 풍력발전기가 줄지어 선 언덕을 향해 본격적으로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정오 무렵, 동서남북 경계가 환하게 열려있는 언덕에 도달. 바로 용서의 언덕 (Alto del Perdon)이다! 환상적인 전망, 고개를 넘나드는 바람이 너무도 시원하다. 서쪽 지평선 끝자락에 보이는 마을이 오늘의 목적지 푸엔테 라 레이나다.

고개 마루에는 연철(鍊鐵, wrought iron)로 만든 순례자 조형물이 서 있다. 일단의 중세 순례자들이 모진 바람을 무릅쓰고 서쪽을 향하는 걸어가는 모습들인데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이 있다.

실제 산티아고 순례길의 전성기가 12-13세기로 당시 연간 약 20만 명, 최대 30만명까지 이 순례길을 걸었다고 추산되는 바 당시 유럽 전체 인구를 감안하면 오늘날 연간 50만 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규모, 그리고 그 고단했을 순례 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조형물에는 “Donde se cruza el camino del viento con el de las estrellas.” = “Where the way of wind crosses the way of the stars”라는 아주 시적인 글귀가 적혀있다 – 바람의 길과 별의 길이 만나는 곳!

이번 순례길을 떠날 때 “용서-은혜” (= Pardon 용서, Grace 은혜, Atonement 속죄, Mercy 자비, Salvation 구원, Redemption 속량), 곧 나 자신을 용서하고, 타인을 온전히 용서하고 또 그들의 용서를 구하기를 바랐는데 이 처럼 일망무제 (一望無際)의 천지경계에 서니 조금은 마음이 뚫리는 기분이다. 이처럼 험한 길의 고행을 통해서 나의 알고 모르고 지은 모든 과오를 성찰하고 또 은혜로서 “용서”를 구하는 마음 간절하다.

순례자 조형상이 있는 언덕 조금 밑에 몇 개의 돌로 구성된 프랑코 정권 희생자 추모 위령비가 있다. 이 지역 인근 활동가로서 탄압을 받고 살해된 92명의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 각기 출신 마을을 상징한다는 소박한 돌덩어리들은 주목을 끌지 못하는 초라함 (?)으로서 그 “의미”를 더하는 듯했다 -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 걸까? 용서에는 한계가 있을까?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처럼 잊지 못하는 용서가 가능한 것일까?

용서의 언덕에서부터는 끝이 보이지 않는 자갈길 내리막(Downhill)이다.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온통 자갈길이다. 다음 마을 우테르가(Uterga)까지 악전고투. 언덕에서부터 한 시간 반 너머 걸려 도착, 혹시나 싶어 쉴만한 알베르게를 찾았으나 여의치 못해 푸엔테 라 레이나 까지 할 수 없이 직행하기로 한다.

다시 한 시간 반 거리의 오바노스(Obanos), 그리고 다시 한 시간, 마침내 순례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꼽히는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여왕의 다리)에 오후 4시 무렵 도착했다. 나바라 왕국의 도냐 마야 여왕(Queen Doña Mayor) 이 순례자들을 위해 다리를 지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인구는 2,500명 남짓, 이 일대에서는 비교적 큰 마을이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가장 먼저 눈에 띈 알베르게에 몸을 맡겼다. 식당이 딸린 곳이라 고민할 필요 없이 저녁도 해결한다 - 오늘도 닭다리가 나오는 순례자 메뉴. 순례길 나흘째, 여전히 고통스러운 날들이다. 며칠 더 지나면 정말로 나아질까.


내일은 에스떼야(Estella) 까지 24Km. The walk goes on – 길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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