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5(에스떼야)

날개만 있다면

by 호변나그네

"이 글은 은퇴 이후의 시간 속에서,

걷고 읽고 사유한 기록을 엮어

인간과 문명, 그리고 나이 듦의 의미를 되묻는

연재 〈길 위에서 다시 읽는 삶〉의 일부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Route 66, 일본 이즈반도를 걸으며

길 위에서 만난 역사와 문학, 신앙과 자유,

그리고 삶의 후반을 천천히 다시 읽고 있습니다"


D+5 (10/13 Mon) Puente La Reina – Estella, 24Km


아침 8시 좀 넘어 출발. 어둠이 걷히자 Pilgrimage 순례자 대형이 자연스레 잡힌다. 삼삼오오 간혹 혼자.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나그네, 박목월)” 길위로 띄엄띄엄 길게 일렬로 늘어선다.

그들 중에는 나처럼 심한 고통을 겪는 이도 있겠지만 역시 묵묵히 그냥 “걷고" 있을 것이라. 두 시간 남짓, 약 8km 전진하여 두 번째 마을 시라우키(Cirauqui) 닿았다. 언덕 위에 자리한 고색창연한 중세풍의 마을이다. 카페에서 휴식, 물병 하나 사고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너무 썼다. 스타벅스가 문득 그리워진다.


세 번째 마을 로르카(Lorca)는 잠시 쉬기 좋은 여건의 한적한 마을. 이제 남은 거리는 10km 남짓. 힘들 때는 노래를 부르고 듣기도 한다. 김민기의 봉우리 그리고 개똥이 – 날개만 있다면 노래. 아이들이 사준 에어팟 프로가 이럴 때 참 유용하다.


“저 산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난 왜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일까

왜 저 시냇물은 저리로 흘러만 갈까

왜 이 세상은 넓기만 할까


날아가고 싶어 날아가고 싶어

시냇물을 건너 푸른 들판 지나

날개만 있다면 가보고 싶어

잣나무 수풀 저 산 너머로”

- 날개만 있다면 (노래극 "개똥이" 중에서, 김민기)

한동안 길동무가 되었던 독일 할배는 부르고스(Burgos, 여기서 약 180km, 일주일 정도 거리)까지만 걷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내년에 다시 올 생각이란다. 어제 저녁을 함께 했던 다른 독일 부부도 부르고스까지만 걷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첫날 안갯속에서 피레네를 함께 넘었던 러시아 아주머니, 론세스바예스에서 만났던 헝가리 부자(父子) 는 이미 팜플로나에서 돌아갔을 것이다. 이처럼 즐기듯 며칠씩 걷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우리처럼 사생결단으로 처음부터 끝까지가 걷겠노라 하는 비장함이 아닌.


드디어 에스떼야(Estella) 도착. 인구가 1만 4천 명 남짓이니 Camino 선상에서는 꽤나 큰 도시다. 동네 어귀 공립 알베르게 체크인, 좀 쉬다가 동네 레스토랑 후원에서 호주에서 혼자 온 아저씨, 독일 베를린 (Berlin)에서 온 내 연배의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내가 있어서 그런지 북한 얘기가 나오고 또 역시 분단국가를 경험했던 독일 아저씨가 독일 통일이 가능 했던 이유를 상당한 배경 지식과 함께 풀어낸다. 그는 1989년 당시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 살았는데 베를린 장벽 (The wall) 붕괴를 다섯 살짜리 딸내미 손을 잡고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남북한이 언제쯤 통일이 될 수 있을까, 결국 지도자의 역할, 그리고 우연 얘기. 그러다 우크라이나 전쟁 얘기까지 이어졌다. 여늬 동네 어른들처럼 남자들이 만나면 정치 경제 얘기에 열을 올리는 모습이 어디서나 똑같다 싶었다. 부인이 이런 자리서 무슨 정치 얘기냐고 입을 삐쭉이는 모습도 빠지지 않고.


낮은 석양이 내려앉은 식당 정원에서 한가한 시간. 편안하고 멋진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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