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6(로스 아르코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로스 아르코스까지

by 호변나그네

D+6 (10/14 Tue) Estella - Los Arcos, 22km


8시 좀 넘어 에스테야 출발. 간밤에 감기 기운이 있어 타이레놀 두 알 먹고 잤는데도 밤새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불면의 밤 뒤에 맞은 멍하고 피곤한 아침. 그래도 어쩌랴, 걸음은 계속되어야 하리(The walk must go on!) 알베르게를 나오자 마자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오늘 6일 차, 남들이 걷는 표준 행정만큼 걷고는 있지만 몸상태나 여건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겉보기에는 평탄한 길 같아도 해발 300m 안팎의 고개를 서너 개는 넘어야 한다. 그때마다 발바닥 무릎 어깨는 분노 게이지를 올려간다. 오늘은 오른쪽 고관절이 저릿저릿 하더니만 제대로 발을 내딛기조차 힘들 만큼 통증이 심해졌다. 쭈뼛한 고통을 억지로 머리 뒤꼭지로 몰아놓고 그냥 걷는다. 환도뼈를 맞은 야곱처럼 절룩이며 걷는다. 걷다 보면 나아지겠지, 스스로를 달래면서.


간밤에 옆 침대를 썼던 호주 할배가 저 앞에 힘겹게 걸어가고 있다. 아마 300파운드는 나가 보이는 체구에 지팡이에 의지한 채, 발을 끌며 정말 느린 걸음이다. 저런 걸음으로는 하루 5km 나 걸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어제 저녁에도 함께 식사하자고 권했는데 꼼짝없이 누운 채로 괜찮다고 - 정말 힘든 순례의 여정을 걷고 있는 듯 하다. 꽤 연배가 있어 일흔 후반으로 보이는데 어떤 사연, 각오로 이 길에 나섰을까? 마음이 숙연해졌다.

두 손 꼭 잡고 작별 인사를 건넨다 “Take care, Keep going and see you there soon!” 거기가 어딘지는 몰라도. 속으로 덧 붙인다. “할배요 그 걸음걸음을 응원합니다. 부디 건강히 산티아고까지 걸으시길!”

길을 걸을 때 힘든 순간이 오면 그냥 발아래 땅만 내려다 보고 간다. 한참을 온 것 같은데 문득 앞을 보면 아직도 고갯길이 한참 남아 있을 때의 아득한 기분. 갑장 시인 기형도의 싯귀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그 소리 그대로다. 발이 닫는 땅 마찰 소리가 배춧잎처럼 타박 타박. 끝없이 타박 타박 그렇게 소리와 친구가 되어 걷는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

- 엄마걱정, 기형도


(*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는 명제를 기형도의 시를 접하곤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빈집”을 처음 읽었을 때 그 아득한 충격을 기억한다. 그 날 이후 시를 쓰는 게 두려워졌다)

첫 번째 마을 아예기(Ayegui) 두 번째 마을 이라체 (Irache) - 여기엔 보데가스 와이너리 (Bodegas Irache Winery)에서 운영하는 와인 옹달샘이 있어 왼쪽 수도꼭지를 틀면 붉은 와인이 왼쪽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온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 아주 좋아할 듯. 오늘은 그냥 물만 채워서 전진.

세 번째 마을 아스퀘타(Azqueta) 마을에서 휴식. 여기까지 8km. 로스 아르코스 (Los Arcos) 까지는 13km 남았다. 휴식 중에 만난 스웨덴 청년이 자기는 바로 다음 마을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Villamayor de Monjardín)에서 쉬리라고 한다. 그래? 그럼 1km 만 더 가면 되는데, 나도 거기서 멈출까? 맘이 살짝 동했다. 이 몸 상태로 12km를 더 가는 건 무리일지도.

그러다 항상 집착하는 “못해도 평균은 해야지” 하는 강박으로 비야마요르를 넘어 계속 걷는다. 어쩌면 이런 자유하지 못하는 강박이 집단화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겠지만 개개인은 참으로 힘든 압박을 등에 지고 사는 셈이다.


비야마요르에서 로스 아르코스까지는 약 12km. 중간에 마을 하나 없이, 쉴 곳도 없는 구릉길이 뙤약볕 아래 이어진다.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그저 배춧잎 소리처럼 타박타박 걷는다.


길에서 만난 니이카타 출신 일본 아가씨, 자기 몸보다 큰 배낭을 메고도 성큼성큼 잘도 걷는다. 자꾸만 멀어진다. 경공술 내지 축지법을 배운 모양. 나는 그냥 타박 타박.

마침내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인구 1,200명) 도착. 눈에 보이는 첫 알베르게 체크인. 비수기라서 알베르게에 여유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씻고 쉬다가 광장에서 맥주 한잔. 타파스 안주가 탁월하다.


저녁은 알베르게에서 다 같이. 옆자리의 아일랜드 청년은 생장에서 여기까지 135Km를 3일 만에 걸어왔다 한다. 놀랍다! 미국인도 세명이나 자리를 함께 했는데 미국 친구들이 모이니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다. 다소 요란하고 오만방자하다고 해야 할까. 다른 이들은 멀뚱히 있다가 이내 자리를 파한다.


오늘 밤 잠이 잘 들기를. 기침 나지 않기를. 모든 피로와 고통이 밤사이 조금이나마 치유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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