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忘却, Oblivion)
지금도 실려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태껏 기억에 남아 있는 예전 국민학교 국어 교과서의 한 이야기가 있다.
동네 아이들이 놀다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내기를 한다. 호랑이다, 귀신이다, 수소폭탄이다 등에서 시작해서 어른들의 훈수까지 곁들여져 전쟁이다, 가난이다, 역병이다 같은 세상의 고통과 공포가 나열된다.
그래도 만족하지 못한 아이들은 동구밖까지 나가 땅거미 무렵 피곤한 걸음을 옮기는 나그네에게 묻는다.
“아저씨,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에요? “
잠시 생각하던 이 초로의 나그네는 쓸쓸하게 말한다
“그것은 망각 (忘却 – “잊어버리는 것”) 이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망각’이라는 인생구비의 함의가 담긴 이 묵직한 단어가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갸우뚱하던 한 아이가 또 묻는다.
“우리 엄마는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살 수 있다고 하던데요”
이 또한 얼마나 오묘한 인생의 지혜가 담긴 말인가.
그러자 나그네는 혼잣말하듯 아득하게 말한다.
“흘러가는 세월에 묻혀 소중한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망각이야 말로 가장 무서운 거란다. 사랑하는 사람도, 소중한 기억도, 그 마음 까지도 언젠가 잊어버리게 하는”
시간의 풍화작용(風化作用)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든다. 대체 어디로 가던 길이었는지 지금은 어느 길 위에 서 있는지 점차 갈 길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문득 허황한 인환(人寰)의 길 위에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세월의 풍진(風塵)에 덮인 모든 게 아스라한 신기루 같기만 하다.
이렇듯 무기력한 시간 속에 잃어버리는 게 점점 많아진다.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 희미하게 기억되지만 점점 시간의 장막이 내려 닫히면 이제 곧 많은 소중한 인연도 잊어버리고 또 잊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지워 버리고 싶은 아픈 기억은 끝까지 가슴에 남아 있는 것도 묘한 일이다.
허전함이 승하면 피아졸라(Astor Piazzolla)의 누에보 탱고(Nuevo Tango)를 꺼내어 들어본다. 길고도 가느다란 애조 띈 선율로 시작되는 오블리비언 (Oblivion=망각) 은 제목처럼 나른히 먼 곳을 보는 듯한 퇴영적 음색이 가득하다. 한참을 흔들리면서 이끌려 가다가 애절함이 더해지면 먼 그리움의 느낌, 그리고 몇 굽이의 서사가 넘나 들면 그것으로 끝이다. 애틋하고도 허전한 꿈을 꾼 것 같은.
피아졸라는 자신이 작곡한 많은 누에보탱고(Nuevo Tango) 중에서도 이 곡을 가장 사랑했고, 대표작으로 꼽았다. 그는 Oblivion, 곧 망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든 살아 숨 쉬는 생명에는 망각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 기억 속에 묻혀 잊히는 것뿐이다. 나를 기억에 묻고 너를 그 위에 다시 묻는다."
정말 그런 것일까?
"은퇴 이후의 시간 속에서 길을 걷고, 고전을 읽고, 개인의 체험을 기록합니다. 산티아고 순례길과 Route 66, 일본 이즈반도를 걸으며 인간과 문명, 나이 듦의 의미를 사유해 왔습니다. 브런치에서는 ‘길 위에서 다시 읽는 삶’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을 주제로 천천히 읽히고 오래 여운이 남는 글을 쓰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