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세유전 (Atavism)의 기억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그곳”에 대한 애틋한 그리고 신비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막연한 그리움에 이끌려 헤매다 우연히 이른 낯선 땅에서 느끼는, 설명할 수 없는 친숙함과 평안함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친숙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알지 못할 그 무엇을 찾아 방랑하는 인간의 모습은 역마살 (驛馬煞) 적 일탈일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깊숙이 내재된 본태적 숙명일지 참으로 알 수 없다.
구약의 아브라함 가족은 인류 최초의 문명이 발흥한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 (Chaldea Ur, 오늘날 이라크 남부의 텔 무가이어 Muqayyar)의 안락한 거처를 떠나 어느 날 황량하고 험악한 ‘그곳’을 향해 길을 나선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 (Harran, 오늘날 튀르키예 동남부 샨르우르파 Şanlıurfa 인근)까지 오늘날 지도를 이용해서 가장 빠른 Route로 간다고 해도 1,250Km, 그리고 하란에서 가나안 세겜 (Shechem, 오늘날 이스라엘 나블루스 Nablusl 인근, 예루살렘 북쪽 65Km 지점) 까지는 850KM – 길도 없었던 당시의 여건을 추산하면 최소 3,000Km가 넘는 대장정이었으리라.
4,500여 년 전 인류의 아득한 여명기에 장장 3,000Km의 반사막과 고원길을 걸어야 했던 그 천로역정은 어떤 소명과 강력한 이끌림이 없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도시적 문명에서 원시적 광야로, 안주에서 험악한 도전으로, 아마도 아브라함은 다른 이들은 절대 이해 못 할, 악전고투 그 먼 길을 걸어 도달한 세겜땅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비록 젖도 꿀도 흐르지 않는 황량한 그곳 일지라도) 비로소 본향을 찾은 듯한 진한 감격을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나에게도 그 비슷한 원초적 본향의 예감을 준 조우 (遭遇)가 두어 번은 있었다. 칼바람 부는 몽골의 Steppe 초원, 알래스카 툰드라 동토에서 느꼈던 기이한 친숙감과 진한 기시감 (旣視感, Deja Vu). 아마도 레테 (Lethe)의 강에서도 지워지지 않은 아득한 옛날의 “기억” 이 여태껏 내 안에서 숨 쉬고 있는 듯한.
어쩌면 내 선조는 옥문관 봉화대 수자리를 살던 한나라 병사였거나 놉노르 (Lop Nur, 로프누르) 호숫가 누란 (樓蘭, Krorän) 왕국을 마지막까지 끝까지 지키던 선비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돌궐 아사나(阿史那)씨의 귀족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서하 제국 오르도스 고원을 달리던 기병, 혹은 더 이르게는 마지막 빙하기 전후로 베링 육교를 넘어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입한 아시아-시베리안의 한 나그네였을 수도. 그래서 오래전 떠나온 그 땅의 기억이 지금도 그리움의 모습으로 나를 부르는 것은 아닐까.
섬머셋 모옴의 ‘달과 육 펜스’에서는 이처럼 신비한 그리움과 방랑의 충동을 격세유전 (Atavism) 적 회귀본능으로 설명한다 - 작중 화자는 친구 아브라함의 "회귀"를 아래 담담한 서사로 인간의 이끌림, 방랑의 근본적 동인을 기술하는데 참으로 그럴 법하지 않는가?
“자신이 태어나도록 정해진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태어나는 사람들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우연이 그를 다른 환경 속으로 던져 넣어 살아 가게 하지만, 그들은 항상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곳 본향에 대한 향수(Nostalgia for a home they know not)를 가지고 살아간다.
자신들이 태어난 그곳에서 그들은 항상 타인 됨을 됨을 느끼며 어릴 때부터 익숙한 나뭇잎 무성한 소롯길 혹은 뛰어놀던 번화한 도시길 조차 그냥 스쳐가는 곳으로 남게 된다. 그들은 가까운 친족들 속에서도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They may spend their whole lives aliens) 자신들에 익숙한 삶의 풍경에서 조차 그냥 동 떨어져 있기 마련이다
아마도 이 같은 자신에 내재된 기묘한 나그네 된 감정이 (this sense of strangeness) 그 로 하여금 영원한 그 무엇을 찾아 온 세상을 헤매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자신에 깊이 내재된 격세유전(Atavism) 적 본능이 오랜 조상이 아득한 여명기에 떠나온 그 땅으로 회귀하게끔 나그네 된 그를 재촉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다가 그는 드디어 참으로 신비스럽게도 자신이 속했어야 한다고 느끼는 그곳에 발을 딛게 된다 (a man hits upon a place to which he mysteriously feels that he belongs). 여기가 바로 그가 추구하던 “본향”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일찍이 보지 못했던 풍경,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들 틈에서 마치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친숙한 이웃인들 처럼 여기며 정착하게 될 것이다. 드디어 그는 안식을 찾는다(Here at last he finds rest).”
- 달과 육 펜스 (The Moon and Sixpence - Somerset Maugham)
“인간은 지향(志向)이 있는 한 방황한다. Es irrt der Mensch, solange er strebt” (Faust 파우스트).
그렇다면 지향을 멈추는 순간, 방황도 끝나는 것일까. 아니면 방황 그 자체가 인간의 본성인 채로, 우리는 끝없이 ‘그곳’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존재일까. 답은 아직, 길 위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