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멍의 시간
요사이 한국의 신조어 들은 이해도 잘 안되고 낯설기만 한데 그중 “불멍” 이란 단어는 참으로 잘 만들어진 말이라도 생각이 된다. ‘불 앞에서 텅 빈 몰입의 경지에 든다’는 걸 이토록 간결하게 표현하다니. 과장하자면 오컴의 면도날로 군더더기를 싹둑 잘라낸 듯한 멋진 표현법 같다.
‘불멍’이 있으면 ‘물멍’이 있을 만도 하고 그러면 “길멍” 이 없으란 법도 없다…. 길멍이란 길 위에서 세상의 복잡한 사념을 내려놓고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잠시 머무는 일이다.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 보이는 모든 것은 실체 없는 공허함이니, 눈에 보이는 것에 매이지 않을 때 비로소 몸과 마음은 자유로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미시간(Michigan) 가는 길, 왕복 여정 600 mile 은 길멍에 빠져 들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 Algonquin Rd. 를 지나 I-290, I-294 Highway로 갈아타고 I-94에 오르면 디트로이트 (Detroit)까지 이어지는 직선의 도로가 펼쳐진다. 단조롭고 외로운 이 길 위에서 손은 운전대를 잡고 오감(五感) 은 사위(四圍)를 경계하나 영혼은 먼 숲과 호수와 바람과 하늘과 구름을 주유(周遊) 한다.
많은 생각들, 떠오르는 그리움들, 그리고 가끔씩 가슴 아픈 기억들, 그러나 길멍에 들면 그 복잡한 사념들이 흩어져 무념무상이 되고, 시간이 정지한 듯 내가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된다. 不知己之夢為運轉與,他在之夢中而為己與 내가 꿈을 꾸면서 운전을 하는 건지 다른 존재가 꿈속에서 나를 나로 삼아 운전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미시간은 원주민 Native Indian의 Mishigamaa 곧 ‘많은 물’에서 그 이름을 가져온 청정한 호수의 고장이다. 수표면적 5 에이커 이상의 “호수 Lake” 만 따져도 11,000 개가 도처에 널려 있고 오대호 (Great Lakes)의 다섯 호수 중에서 네 개의 호수(Superior, Huron, Michigan, Erie)와 접하며 미국의 4개의 호변국립공원 (National Lakeshore; Apostle Islands, Pictured Rocks, Sleeping Bear Dunes, Indiana Dunes)가 모두 MI 인근에 모여있다.
중서부의 다소 나른한 평온함, 아름다운 호수, 호변의 백사장, 푸름 가득한 숲이 지천인 “Pure Michigan”(미시간주의 슬로건)이다. 오늘도 영화 Somewhere in Time (사랑의 은하수, 1980), Hemingway's Adventures of a Young Man (청춘의 모험, 1962) 영화에 나오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길을 간다.
눈을 감고도 훤하게 떠 올릴 수 있는 그 길 - 미시간호 남단 Gary, Michigan City, Paw Paw, Kalamazoo, Battle Creek, Marshall, 그리고 Jackson을 지나면 Ann Arbor, 여기서 북동쪽 사선으로 올라가면 Plymouth를 거쳐 목적지 노바이 (Novi)에 닿는다.
그렇게 길을 간다. 온갖 복잡한 상념을 “멍” 으로 바꾸어 세상을 잊어버리고 시간을 잊어버리고, 나도 잊어버린 채 계절이 있는 아름다운 미시간 길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