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의 공동묘지

금정산 엘레지(Elegy) - 실화임

by 호변나그네

고향의 기억


자신이 자라난 고향은 하늘의 햇살, 나뭇잎들의 빛깔, 길거리의 소음, 골목 같은 좁은 공간, 혹은 같이 놀던 친구들의 미소 같은 다양한 모습이 뒤엉켜 기묘한 그리움으로 남게 된다.


예를 들면 까마득한 옛날 국민학교 시절, 교실의 열어둔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고 옥양목으로 만든 커튼이 크게 일렁이면서 낮은 햇살, 상쾌한 바람, 하얗고 부드러운 커튼이 내 머리 위로 살랑이던 그날 유년기의 기억은 생생한 정지화면으로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 왜 하필 그때의 기억일까?

아하!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올 봄 혹은 가을엔 고향 부산의 금정산을 다시 걸게 되길 바란다. 많은 것이 변했다곤 하나 아직도 동문에서 북문을 잇는 능선길, 낙동강과 수영만이 환히 바라보이는 그 가슴 트인 조망은 그대로 일 것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옛 길들, 병풍사, 무위암, 고별대, 대륙봉, 고당봉 그리고 남북 동문 북문 같은 그리움 많은 그 길들을 이젠 편하게 느린 걸음으로 하루 종일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겐 그 길에 얽힌 기이한 사연이 있다.


어느 해 가을녁, 대학 복학 전후로 기억된다. 어떤 일로 집에 왔다가 혼자서 범어사 – 북문 – 동문을 거쳐 하산하는 짧은 산행을 나섰던 길이다. 하도 많이 다닌 길들이라 눈 감고도 다닐 수 있다고 매양 자신했었는데 동문을 지나니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되어 버렸었다. 보통은 동문에서 산성 고개를 거쳐 산길을 타고 고별대까지만 내려오면 바로 큰길이라 어두워도 큰 부담 없이 걸어왔던 길이다.


그런데 산성고개에서 고별대로 내려서는 길을 어디선가 놓쳤던 모양인지, 전혀 익숙지 못한 산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깜깜한 밤길, 이런 길도 있었나 싶은 묘한 부조화의 감정을 느끼며 걷는 중 아주 어슴푸레한 달빛 속에 몇 기 밖에 없는 자그마한 공동묘지가 나타났다.


'월하(月下) 공동묘지'의 기상(奇想)


왠지 모를 오싹한 느낌에 빠른 걸음으로 묘지를 지나치는데 발에 무언가 걸려 넘어질 뻔하였다. 내려다 보니 희미한 달빛 속에서 아주 날렵하게 생긴 비석이 발 길을 막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시절에는 보통 넙데데 한 비석이 일반적이었는데 보기 드물게도 길고도 가냘픈 비석이 갓 봉분을 올린 듯한 작은 묘에서 길 쪽 내 발치로 쓰러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문득 애틋한 마음이 생겨 비석을 일으켜 똑바로 세워주고 땅을 몇 번을 발로 다져 이젠 쓰러지지 말라고, 그리고 짧은 명복까지도 빌어 주었던 것 같다.


비문을 읽고 싶어도 워낙 주위가 어두워 그냥 비석을 다시 세워 주는 일에 만족하고 가던 길을 재촉하는데…. 한두세 발 자국 걸어 나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머리를 확 잡아당기는 듯한 아찔 송연한 느낌이 뒤로부터 왔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려 뒤를 돌아보는데, 그 순간 두꺼운 구름 속에 숨어 있던 달님이 갑자기 나타나 화안한 달빛을 내려쬐었다. 뒤를 돌아보는 내 눈에 바로 그 비석의 명문(銘文)이 대낮처럼 눈에 들어왔다.


千秋寃恨 善玉之墓 (천추원한 선옥지묘) - 문득 교교 (皎皎) 하게 내려쬐는 달빛 속에 이 비문의 뜻이 내 의식에 자리 잡기까지 몇 초가 걸렸던 것 같다. 맨 처음 기계적으로 든 생각이 원한이라… 보통은 怨恨(원한) 이란 한자를 쓸터인데 왜 굳이 寃恨 (억울할 원, 한탄할 한)이란 자를 썼지? 곧 몇 초 뒤에 선옥지묘의 의미가 내 의식에 닿고 두 구절이 이어지자.. 그야말로 난 완전히 얼어버렸었다….


천추원한 선옥지묘(千秋寃恨 善玉之墓)


“천추에도 씻지 못할 원한을 품은, 선옥이 잠든 묘”를 홀로 월하의 공동묘지에서 만나 본다는 것은 당혹 혹은 경악이 지나쳐 아예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 무언가 비현실적인 심령적 환각을 보고 있음에 다름 아니었다. 다시 몇 초가 지나 완전히 비문의 내용이 머릿속 이해 중추에 닿자 그제야 무시한 공포가 밀려오고 아니지 이건 꿈이겠구나, 아마 잘못 보았겠지 하는 혼미와 주저앉고 싶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금방이라도 새하얀 소복을 입고 산발한 젊은 여자, 선옥이 무덤을 헤쳐 뛰쳐나오는듯한 환상까지도 보는 듯했다


사력을 다해 정신줄을 잡고 뒤를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혼비백산 (魂飛魄散 - 혼백이 어지러이 흩어져 정신이 혼미해짐) 이 대체 어떤 것인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얼마나 놀라고 넋을 잃었던지 그 밤에 어떻게 산을 내려왔는지, 어디서 그 묘지를 만났던지 조차 흐릿한 기억의 저편으로 넘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달빛아래 선옥의 묘가 과연 사실이었는지 환상이었던지 애매한 기상(奇想)으로 남게 되었고 세월만 흘렀다


금정산의 Elegy (비가 悲歌)


아주 어릴 때 TV에서 본 영화 중에 '나의 청춘 마리안느'라고 하는 흑백영화가 있었다. 주인공이 호숫가 고성에서 우연히 신비로운 처녀 마리안느를 만나게 되고 구원(久遠)의 여인으로 남게 된다. 그러다 마리안느로부터 구해 달라는 쪽지를 받고 친구들과 함께 고성으로 쳐들어 가나 그곳에 마리안느의 아주 오래되고 낡은 초상화만 덩그러니 걸려 있을 뿐이었다. 영화는 그녀가 실재하는 비련의 여인인지 혹은 주인공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지 몽환과 환상속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영원한 사랑 마리안느를 찾아 정처 없는 길을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과연 그날 달빛 아래서 본 것이 사실이었을까? 마리안느 혹은 천녀유혼 같은 절절한 사연이었다면 대체 선옥은 누구였을까? 명문(銘文)으로 천추원한을 새길 정도였다면 대체 어떤 깊이의 포한(抱恨)을 가진 건가? 대체 누가 그토록 가슴 아픈 묘비를 세웠을까? 혹은 그 모든 것이 그냥 내 머릿속의 환상(幻想) 기사(奇思)는 아니었을까 - 아직도 탈고되지 않은 전설로 남아있다.


사실 우리 애증(愛憎)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면서 그토록 애끓는 비원이 어디든 없으리오. 아마도 그 어느 누이의 절절한 한(恨)이 다할 데 없어 문득 지나가는 나그네로부터 잠시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도.


장한가 (長恨歌) - 한 없는 그리움


천장지구유시진 (天長地久有時盡)

아무리 천지가 오래도록 갈지라도 언젠가 다할 날이 있을 건만,

차한면면무절기 (此恨綿綿無絶期)

이 슬픈 한은 아무리 세월이 가도 다할 날이 없으리다

- 장한가 (長恨歌), 백거이(白居易)


내가 살던 동네 금정산 자락 또한 온통 고층 아파트로 채워져 이미 상전(桑田) 이 벽해(碧海) 되어 버렸으니 아마도 그날의 사연 어린 작은 공동묘지도 이미 없어졌으리라 생각된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으니 선옥의 한 (恨) 도 이젠 누그러졌을지 아니면 아직도 그 한(恨)이 중음신(中陰身)으로 무절기(無絶期) 할지 궁금하다.


금정산 산행길엔 Elegy (비가)가 되고 전설이 되어 버린 그 사연을 찾아보았으면 좋겠다. 아마도 선옥의 한이 서렸던 산 아래 인환 (人寰)의 거리에서는 여전히 사랑과 미움의 바람이 가득 불 것이라.

매거진의 이전글상실 (喪失) 그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