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퇴근할 때 출근하던 나
술을 마시면 긴장이 풀어지고, 때로는 자신감이 생기거나 마음이 열리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이 술을 마시면 평소에는 하지 않았을 속 얘기를 하곤 했다. 나 역시도 그랬고, 더불어 말주변이 없다는 점을 약간 감출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20대 초반에 우연한 계기로 가게 된 칵테일 바에서 바텐더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꼈다. 동네 번화가에 위치한 그곳은 바 외에도 1층과 (복층에 가까운) 2층까지 테이블이 여러 개 있어 규모가 작지 않은 편이었고, 여성 바텐더도 3~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친근하면서도 전문적인 면모의 그들은 어린 나의 눈에 호기심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야말로 술을 자주 접할 수 있고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잖아.'
일하는 동안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글을 쓰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마침 조주기능사 자격증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에 대해 무료로 가르쳐 주는 '조니워커스쿨'이란 곳도 알게 되었다. 술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 술을 좋아하는 다양한 매력을 가진 사람들도 알게 되어 즐거운 시간이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실기를 대비한 칵테일 레시피 50여 가지를 달달 외우고 다녔다. 돌이켜보면 그 많은 가짓수의 레시피를 어떻게 다 외웠나 싶다. 내 인생의 첫 자격증이기도 했고 열정과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 덕분에 자격증을 한 번에 딸 수 있었지만 정작 이걸 활용한 적은 없었다. 호텔을 제외한 대부분의 바에서는 자격증을 요구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보다는 경력이나 외모를 더 중시하는듯했다.
자격증을 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조니워커스쿨 측에서 딱 한 번 일자리를 주선해 주는 제안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패밀리레스토랑의 바 자리였다. 내가 기억하는 그곳의 바텐더는 음료 제조만 도맡다시피 하고 손님과 이야기하는 걸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그때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그 자리를 거절했다.
이후 추가적인 연락이 오지 않아서 직접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일자리를 구하기가 영 힘들었다. 경력이 없다는 것 외에도 밤에 근무하는 일인지라 집에서 먼 곳의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첫차가 다닐 때까지 시간을 때우기도 어렵고 매번 택시비를 지출할 생각을 하니 아까워서 엄두가 안 났다.
지원할 수 있는 동네의 바는 한정적이었다. 가장 일하고 싶은 곳은 처음 접했던 칵테일 바였지만, 아무 경력 없이 지원하자니 왠지 나를 써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먼저 일을 시작했는데 예상보다 근무조건이나 페이가 좋지 못했다.
두 번째로 일했던 곳이 문을 닫으면서 이제는 처음 원했던 곳에 지원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으로 기억하던 내가 면접을 보러 오자 지배인님과 바텐더들은 당황스러우면서도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도 함께 일할 수 있었고, 나 또한 바 너머의 손님이 아닌 그 안에서 직원이자 동료가 되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한 계절이 지나는 동안 정말 재밌게 일했다. 여기 전에 거쳤던 두 군데 바와는 달리 자괴감을 덜 느낄 수 있었고, 어느 정도 규모 있는 곳에서 체계적으로 일을 배운다는 것이 좋았다. 눈에 익고 나를 알아봐 주는 손님들도 늘어갔다.
손님이 뜸한 시간대에는 매장에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틀기도 하고, 칵테일을 새로 개발하려고 이것저것 만들어보기도 했다. 그저 일개 직원일 뿐이었지만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이 매장이 마치 내 것인 듯 구석구석 알고 싶어졌고 소중해졌다. 번거롭고 재미랄 것도 없는 재고관리까지도 괜히 즐거웠다.
이른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을 지나쳐 퇴근할 때마다 힘든 것보다는 보람찬 기분이 더했다. 저녁에 출근할 때도 귀찮았던 적은 별로 없었다. 일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뿌듯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 매일 로테이션으로 근무시간이 바뀌어도, 술을 매일 마셔야 해서 힘들어도, 밤낮이 바뀌는 생활에 몸이 고단해도 이 사람들과 여기서 일하는 게 좋았다.
'나 정말 이 일을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기쁨을 느끼는 내가 좋았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