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스캔들(2007, KBS)
그대의 연인은 독립투사. 나의 그대는 변절자.
청춘은 언제나 봄. 조국은 아직도 겨울,
아! 해방된 조국에서 신나게 연애나 해봤으면!
여름 하면 생각나는 드라마 중 <경성스캔들>을 빼놓을 수 없다. 2007년 여름 방송된 <경성스캔들>은 시청률 면에서는 다소 저조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명작 드라마로 기억되고 있다.
1930년대 경성, 닮은 듯 다른 네 남녀
경성 최고의 모던보이 선우완은 '십 분이면 경성의 모든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부하는 자타공인 스캔들 메이커이다. 완벽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그는 인생이 복잡하게 꼬이는 건 싫다. 그래서 외면과 방황을 스스로 택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무엇이 옳은지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형, 그리고 형을 밀고한 이가 친형제나 다름없던 죽마고우라는 건, 여린 그에겐 너무나도 큰 상처이고, 헤집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회색 주의자인 아버지와 친일파인 새어머니를 싫어하면서도, 그 역시 스스로 현실을 도피하는 편을 택했다. 조국에 터럭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는, 그렇다고 조국에 해가 되지도 않는 룸펜으로 선우완은 살아간다.
그런 그 앞에 나타난 여자. 경성 최고의 촌닭, 조선의 마지막 여자, 일명 조마자란 별명을 가진 나여경이 등장한다. 편안함과 단순함을 추구했던 그의 인생은 그녀의 등장과 함께 스펙터클 액션과 로맨틱 코미디를 넘나들게 된다. 늘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만을 입고 다니는 여경. 그녀는 도무지 선우완과 같은 모던보이의 가치관을 이해할 수가 없다.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잇고자 하는 그녀는 다부진 성정과 함께 맑고 순수함을 지녔다.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두 사람의 인연은 술자리의 심심풀이 내기에서 시작되었지만, 만남이 거듭되면서 우연은 필연이 되고, 호기심은 관심이 되고, 오해와 편견은 이해가 되어간다. 결국 두 사람은 진실한 사랑으로 서로를 성장시켜가면서, 함께 혁명과 사랑을 이뤄낸다.
그리고 여기, 선우완-나여경과는 사뭇 다른 또 한 쌍의 남녀가 있다. 이수현-차송주. 조선총독부 보안과의 조선인 엘리트 이수현. 일본인 간부들조차 인정하는 뛰어난 두뇌와 능력을 가진 남자. 반듯한 얼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도 그의 냉철한 눈빛이다. 바람직한 기럭지에, 친절한 매너, 똑똑함까지.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왜 이런 사람이 친일파일까 한탄스러울 지경이다.
언제나 과묵하고, 표정 변화도 잘 없는 그가 지닌 상처와 비밀은 생각보다 훨씬 깊다. 오로지 조국해방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살리며 눈앞에서 죽어가던 친형 같았던 동지를 위해, 소년은 기꺼이 자신의 삶을 버리며, 변절자, 밀고자, 친일파, 총독부의 개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가족도, 은인도, 친구도 등진채, 소년은 외롭고 처절하게 혼자만의 싸움을 거듭하며 그토록 단단한 청년이 된 것이다.
그런 그를 '평생 사는 동안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다'는 여자가 있다. 차송주. 경성 최고의 기생. 연예인이 없던 시절, 경성 최고의 스타가 바로 그녀다. 도도하면서 우아한, 섹시하면서도 품격 있는 그녀는 겉모습만 최고인 게 아니라,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 친구와 동지들을 생각하는 마음까지도 깊은, 멋진 여자다. 누가 봐도 너무나 아름다운, 게다가 그 내면은 더 아름다운 그녀이기에, 그녀가 가진 상처가 더 마음 아프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빚 대신 기생이 되어야 했던 소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소녀를 위로해준 소년이 있었다. 소년이 말한 대로 그녀는 강해지기로 했다. 꽃다운 소녀는 그렇게 너무나 험한 길을 스스로 택했고, 이겨냈다. 그녀는 자신이 그와 같은 길을 걷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 길 어딘가에서 소년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그녀의 바람대로, 먼길을 돌아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러나 다시 만난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의 변해버린 모습에 그녀는 화가 나기보다는 한없이 슬퍼졌다. 그런데, 그의 비밀을 알고 나니 그의 지난 삶이 아파서 더 가슴이 시리다. 그렇게 같은 상처를 지니고, 같은 길을 걸었던 두 남녀는 온통 아픔뿐인 삶 속에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서로에게 유일한 위로이자 사랑이었다.
그럼에도 살아가고, 사랑하는, 청춘에 대하여.
'청춘'만큼 과소비되는 말도 없을 것이다. 닳고 닳은 이 말은 그럼에도 언제나 빛난다. 어느 시대에나 청춘은 존재한다. 어느 시대에나 청춘은 흔들리고, 방황하고, 성장하고, 단단해지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사랑한다. 1930년대 경성, 그때 그곳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태어나보니 나라가 없었고, 우리말과 글이 없었고, 우리 영혼이 짓밟히고 있었던 그 시절의 경성에도 청춘은 있다. '경성스캔들'이 처음 우리에게 던진 화두는 이것이다.
"조국은 왜놈에게 짓밟혀 신음을 해도, 청춘남녀들은 사랑을 한답니다. 그게 인간이에요."
'경성스캔들'은 1930년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살아가야 했던 청춘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경성스캔들'을 이끌고 가는 네 명의 주인공. 선우완, 나여경, 이수현, 차송주. 이 네 사람은 닮은 듯 다르다. 완과 여경이 시대 앞에서, 사람과 사랑 앞에서 성장해가는 청춘이라면, 수현과 송주는 시대가 청춘에게 준 상처를 고스란히 감내하고 견뎌내 간다.
종래에 이들은 모두 단단해져서 스스로의 신념을 행동으로 실천한다. 그들은 청춘을 가장 빛낼 수 있는 방법으로 그 시절을 살아낸다. 시대와 관계없는 개인의 삶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경성스캔들'은 시대가 준 수많은 상처와 고난 속에서도 청춘이었기에 할 수 있었던 사랑과 청춘이었기에 굽히지 않을 수 있었던 신념의 가치를 네 남녀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시대를 불문하고 존재하는 모든 청춘들에게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청춘이 가질 수 있는 '희망'과 '사랑'이다.
먼저 가신 분들이 남겨주신 소중한 땅에서
경성스캔들의 유명한 마지막 문구다. 여전히 뭉클하다. <경성스캔들>은 유쾌하지만 결코 가벼운 드라마가 아니다. '청춘'과 '사랑'이라는 주제를 택했기에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으로 경쾌한 터치를 가미했을 뿐, 그 저변에 깔린 주제의식과 생각거리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무엇보다 <경성스캔들>은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 독립투사들이 사실은 우리와 같은 젊은이들이었고, 연인을 사랑하고, 친구를 위하고, 가족을 걱정하는 한 명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의 삶과 행복을 미뤄두어야 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씩 <경성스캔들>과 같은 드라마가 나타나서 그래도 우리가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를, 용기를 주었으면 한다.
여경 저는, 하루라도 빨리 조국을 해방시켜야겠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고통받지 않고, 아무도 위험하지 않고, 사람이 타고난 품성 그대로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수현 나여경씨.
여경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마음껏 공부하고, 웃고 싶은 사람은 마음껏 웃으면서 살아가고, 사랑하고 싶으면 마음껏 사랑하고, 그렇게 살 수 있는 세상을 하루라도 빨리 만들어야겠습니다.
수현 조국 해방은 그렇게 단시간에 해치울 수 있는, 혁명 과제가 아닙니다.
여경 그러니까 제가 먼저 시작하겠다는 겁니다!
수현 우리의 거사가 분노에 사로잡힌 살인극이 됐으면 좋겠습니까? 우리 세대가 아닙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일입니다. 우리는 당분간 이 위험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욕심을 버리세요. 이 위험 속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으세요. 그게 혁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