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터너(2016, KBS)
<페이지터너>는 스스로는 도저히 넘길 수 없는 청춘의 한 페이지에 서 있는 세 아이의 이야기다.
한주예고 피아노과 1등 윤유슬은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불의의 사고로 실명하고 만다. 피아노를 시작한 이후 늘 엄마의 뜻대로만 살아왔던 유슬은 두 눈을 잃어버린 절망적인 상황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그런 유슬과 평생 라이벌인 피아노과 2등 서진목. 컴퓨터가 치는 듯한 완벽한 연주를 하지만 감정이 없어 '사이코패스'라는 소리를 듣는다. 진목은 탁월하다 믿었던 자신의 재능이 그야말로 어정쩡한 것은 아닐까 두렵다. 게다가 유슬의 사고가 자신의 기도 때문인 것 같아 죄책감을 느낀다.
장대높이뛰기 국가대표 정차식. 단순 무식하지만 매사 자신만만한 차식은 무시하면 빡돈다고 해서 별명이 '무빡'이다. 엄마가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고 빡돈 차식이 초인적인 능력으로 국가대표에 선발된 날, 하필 부상으로 인해 선수생명이 끝나고 만다.
<페이지터너>의 세 주인공은 사실 너무 암담하고 갑갑한 지점에 서있다. 그런데도 드라마는 시종일관 낙천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이 겪는 일이 인생에 있어서 엄청난 좌절이라는 생각도 그다지 들지 않게 한다. <페이지터너>는 이 아이들이 얼마나 힘든가에 집중하는 대신 이들이 시련을 어떻게 이겨내는가에 집중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세 아이의 싱그러움을 담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세 아이는 서로의 페이지터너다. 차식은 유슬의 도우미로서 눈이 되어준다. 유슬은 피아니스트가 되고픈 차식에게 선생님이 되어준다. 앞을 보지 못하는 유슬과 피아노를 처음 치는 차식이 콩쿠르에 도전하는 모습 그 자체가 진목에게는 깨달음이 된다.
결국 악보의 끝에서 세 아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된다. 유슬은 엄마의 꿈이 아닌 자신의 꿈으로 피아노를 아름답게 연주한다. 차식은 유명 피아니스트의 아들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당당하게 연주한다. 진목은 어쭙잖은 재능이라 의심하지 않고 그저 행복하게 연주한다. 그들은 그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비로소 자신이 된다.
<페이지터너>를 보며 '내가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삶의 페이지를 넘겨가며 완성해야 할 것은 다른 누군가의 꿈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무엇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힘들고 버거울 때 우리 곁에 페이지를 넘겨줄 페이지터너가 있으리라. 다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함께' 서로의 페이지를 넘겨주며 모두 '각자'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와 그의 시작이 되어 준 두 친구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자막을 띄웠으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는 이가 누구인지 드라마는 알려주지 않는다. 셋 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들은 앞으로도 아름답고 당당하고 행복하게 피아노를 칠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