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의 눈동자 (1991, MBC)
<여명의 눈동자>. 1991년 MBC에서 방영되었다. 많은 이들이 인생의 명작으로 꼽는 이 드라마는 대단한 시대극이면서 동시에 절절한 멜로드라마이다. 드라마를 뛰어넘은 드라마라는 찬사를 받는 이 작품은 늘 다시 보고 싶은 드라마에 손꼽힌다. 25년이 흐른 지금 보아도 전혀 고루하지 않으며, 깊이 있고, 훌륭하다. 이런 드라마가 또 한 번 나와주길 간절히 바라지만, 아마 <여명의 눈동자>를 뛰어넘을 드라마는 다시없을 것 같다.
이제는 고인이 된 드라마계의 전설 김종학 감독님과 그의 오랜 동반자이자 뛰어난 필력을 지닌 송지나 작가님은 이 드라마를 '사전제작'으로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생소했을 터이지만 지금은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선구안을 지녔는지 절감할 수 있다. 그러나 2년이 넘는 제작기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해외 로케이션과 힘든 촬영으로 인해 마지막회 방영 전날에야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김종학 감독님은 <여명의 눈동자> 스페셜에서 "처음부터 이런 힘든 여정인 줄 알았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도 지금도 지적인 이미지로는 최고인 배우 박상원이 장하림 역을 맞춤옷처럼 소화했고, 채시라는 그 자체로 한반도를 상징하는, 굴곡진 삶을 사는 윤여옥 역을 맡아 필모그래피 최고의 발자취를 남겼고, 온갖 고초를 겪으며 온몸으로 시대와 맞섰던 최대치 역을 맡은 최재성의 열연은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들었다.
<여명의 눈동자>는 위안부, 생체실험 등 일제의 잔혹한 범죄들에 대해 고발하고, 해방 후에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북으로 나뉘었던 이 땅의 가장 암울했던 역사를 낱낱이 그리고 섬세하게 그려낸다. 장하림, 윤여옥, 최대치 세 사람의 인생 역경은 한반도의 가슴 아픈 근현대사 그 자체이다. 세 사람 중 하나를 빼고 여명의 눈동자를 논할 수 없듯이, 세 사람이 온몸으로 부딪쳐온 역사를 일부분이라도 빼고는 한국의 근대사를 논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 사람은 결국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에서 내 마음을 쉼 없이 두들긴 이가 있다면, 그는 장하림이다. 이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한반도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사람, 장하림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6.25 전쟁으로 이어지는 그 시기, 한반도에 있었던 이들 중 누군들 그런 시대에 살고 싶었을까. 그러나 장하림은 유독 그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학도병으로 차출된 후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눈을 잃은 자, 팔이 없는 자, 아예 두 다리가 없는 자. 이들 속에서 나의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내 손으로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나도 내 손으로 누군가를 죽여야 할 때가 올 겁니다.
죽일 만큼 미워서 죽이는 게 아닙니다. 그저 죽이는 겁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요.
언젠가 읽어드린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을 기억하십니까.
'그래도 인간은 사는 것이다. 인간이란 어떤 것에도 익숙해지는 존재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적절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나도 이 전쟁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요. 가즈꼬, 이건 당신네 일본인들의 전쟁입니다.
나는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가즈꼬.
'그래도 인간은 사는 것이다. 인간이란 어떤 것에도 익숙해지는 존재다.' 그러나 그 스스로 인간에 대한 가장 적절한 정의라 여겼던 이 문장은 그에게만큼은 해당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전쟁에도, 어떤 사상에도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때 군국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까지 그렇게 수많은 '주의'들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각자의 '주의'에 그토록 몰두했다. 그것은 아마 그렇지 않고서는 그 시절을 견뎌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국 뭘 생각해?
하림 그냥...
일국 그냥 뭐?
하림 얼마나 될까 하고. 그동안 내가 죽인 사람들.
일국 어쩌다가 네 놈하고 한패가 됐니 그래... 언젠가는 사람을 죽이는 게 큰일 나는 세상이 오겠지. 이 세상이 지나면 언젠가는... 너하고 나는 이 시대를 잘못 태어난 죄밖에 없어.
그러나 하림은 어떤 사상에도 몰두하지 못했고, 죽여야 사는 삶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가 예상한 대로 결국 그도 사람들을 죽여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인의 손에 끌려온 전쟁터에서, 미국과 소련이 나눠놓은 이 땅에서 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는 것만이 그가 몰두할 수 있는 목표였다. 그렇게 살아야 했던 자신과 이 나라에 무력감과 절망을 느끼면서도, 끊임없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회의하면서도, 그는 무언가에 익숙해져, 그 믿음에 자신을 의탁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버릴 수 없는 조국, 끊임없는 선택
동경제대 의학부에 재학 중인 인텔리, 죽은 스승의 부인과 사랑을 나누는 젊은 유학생. 처음에 장하림은 시대로부터 도피해있었다. 그러나 무의촌의 의사가 되겠다는 그의 소망을 시대는 용납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전쟁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731부대의 위생병이 된 하림은 일본인의 끝없는 극악무도한 만행에 분노하고 치를 떨면서도 살기 위해 동조했다. 731부대에서 만난 동료는 하림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봐, 이 부대에서 제정신 가지고 살아남고 싶으면 절대 생각해서 안 될게 세 가지가 있어.
절대 생각해서 안될 것.
첫째, 인간이란 무엇이냐. 둘째, 인간이 이럴 수 있을까. 그리고 셋째, 나도 인간일까."
인간이길 포기하게 만드는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은 하림에게 원죄로 남았다. 후에 그는 그 시기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형, 형을 위해서 사상 같은 거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요. 형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남쪽에 미련 둘 만한 거 아무것도 없고요. 잘하면 형 하고... 형 하고 한 편이 되어서 편하게 살 수도 있겠죠. 그런데요,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먼저 동지를 팔아야 돼요. 학도병 시절에 731부대라는 데에 있었어요.
거기 마루타 중에 조선사람이 있었는데 난 그 사람을 도와줄 수가 없었어요. 내가 살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고요. 그때 난 내가 짐승하고 하나도 다를게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 하나 사는 것 밖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짐승이요. 다신 날 그렇게 만들고 싶지가 않아요, 형."
그를 짐승처럼 살게 한 것은 일본이고, 그것을 방관한 것은 조선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조국을 버릴 수 없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벌써 내 조국이란 건 없었어. 우습지 않나. 생전 불러보지도 못한 조국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된다는 게 말이야. 나이가 어려서 우리말을 쓴다고 학교에서 벌을 섰었지. 커서는 조센징이라는 이름으로 군대에 끌려갔고. 조센징이기 때문에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어.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는 것, 도망쳐 갈 데도 없는 것.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가 없는 것. 그게 조국이라는 건가."
그는 731부대의 악몽 같았던 시절이 끝난 뒤 독립군이 되고, 스파이가 되고, 경찰이 되어, 조국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다.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조선 사람들은 늘 의미 없이 죽어야 했고, 그것은 해방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그는 의미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조국은 그에게 끊임없는 절망만을 주었다. 조선의 어른들은 제 나라를 지키지 못해 조선의 소녀와 소년들을 일본인들의 군화에 짓밟히게 했고 해방 후에는 그런 일본에 동조했던 이들이 여전히 남아 사람들을 억압했다. 그는 731부대에서 마루타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죽었고, 해방 후 4.3 사건이 일어난 제주도에서도 사람들을 살리려는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반민특위에 희망을 걸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조선은 독립을 맞았지만, 한반도는 해방되지 못했다.
하림의 어머니를 죽게 만들고, 하림과 여옥에게 모진 고문을 했던 친일 악질 경찰 스즈키가 광복 후 여전히 경찰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억눌렀던 분노를 폭발시키고 만다. 해방이 되었다고, 네가 왜 여기 있냐고 소리치는 하림의 절절한 외침을 들으며 우리는 뒤틀려버린 우리의 역사와 죄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 그에게 조국은 마지막까지 가혹한 선택을 요구한다.
"아까 낮에 도경국장이 왔었습니다. 장례 식에요. 그 사람, 일제 때 고등계 형사였습니다. 그 사람한테 고문을 받고 저희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나 역시 죽을 만큼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난 명색이 독립군이었으니까요. 그치가 도경국장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리고 그 밑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겠다."
결국 조국을 벗어날 수 없음을 절감하며, 하림은 친일 경찰 밑에서 전투경찰이 되기로 한 선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내가 하는 것이 낫겠다고. 그것은 체념이자, 희생이었고, 그가 영원히 벗어던질 수 없는 숙명에 대한 끄덕임이었다. 조국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그에게 가혹했고, 그는 묵묵히 그 가혹함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그가 조국처럼 사랑했던 여자, 윤여옥
일국 이봐. 좀 냉정해지자고. 우린 앞으로도 할 일이 많아. 제발 그 감상 좀 버려! 우린 너나없이 목숨 바치자고 작정한 사람들인데...
하림 뭐 때문에!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사는 어떤 나라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여옥이 같은 여자가 죽고 나면 누굴 살리기 위해서. 넌 뭐 때문에 목숨 바쳐가며 사람을 죽이니...
그리고 하림의 인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 그가 사랑했던 여인, 윤여옥. 어쩌면 사이판에서 그녀를 만난 후 그의 인생은 오로지 윤여옥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남자로서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다만 그는 여옥을 살리기 위해 매번 목숨을 건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림에게 여옥은 사랑하는 여자, 그 이상의 의미였다.
여옥 왜 나한테 이렇게 해줘요?
하림 그런 질문받을 줄은 몰랐는데요. 그저 고맙다고 할 줄 알았는데.
여옥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
하림 왜 당신한테 이렇게 잘해주는지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글쎄요. 우선은 당신이 같은 조선사람이기 때문이겠죠. 또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저 해줄 수 있기 때문이겠죠. 사람이란 건, 자기의 힘으로 남한테 뭔가 해 줄 수 있을 때, 살 맛이 나는 거 아닌가요?
하림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 전쟁터에서 뱃속의 아이를 살리고자 하는 여옥의 집념에 아이러니를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집념이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맨 인간다움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을 것이다. 하림은 자신이 살리지 못했던, 혹은 죽여야만 했던 그 모든 이들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여옥을 돌보았을 것이다. 때문에 여옥이 아이를 살리기를 원하는 만큼, 하림도 여옥과 여옥의 아이를 지키고자 애썼던 것이다. 여옥은 그에게 단순히 지켜주고 싶은 여자가 아니라, 모든 것을 걸어서 지켜내야만 하는 마지막 희망이자, 인간다움이었다.
그리하여 여옥을 살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그에게는 살맛 나는 일이었다. 무엇도 선택할 수 없었던 그가 유일하게 선택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여옥이었으리라. 여옥은 자신을 위해 매번 목숨을 거는 하림에게 보답해 드릴 것이 없다고 했지만, 하림은 이미 보답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옥이 하림을 살게 했으므로. 그의 삶이 계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옥이었으므로.
하림 여옥이 소식을 들었어.
명지 소련에 있을 때 기차를 탄 적이 있어요. 몇 날 며칠을 계속 가는데 그게 다 소련 땅이래요.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더라고요. 나는 왜 이렇게 넓은 땅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어쩌다가 이 한반도 좁고 한심한 땅에 태어나 이 고생을 하는가. 그런데요, 그러다가 어느 간이역에서 조선사람을 만났어요. 누가 지나가면서 혼잣말을 하잖아요. 어휴, 드럽게 춥네. 그 조선말을 듣는 순간, 참 이상하죠. 눈물이 왈칵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막 울었어요. 그러니까 당신한테 여옥 씨는 조국과도 같은 존재인가요?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도망칠 수도 잊어버릴 수도 없어요? 그래요?"
하림 .... 그런 것 같아.
하림에게 여옥은 조국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그는 무언가를 바라고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저 사랑한 것이다.하림은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들만큼 그렇게 여옥을 사랑한다. 한 여자를 이토록 절절하게, 이토록 쓸쓸하게 사랑했던 한 남자는 끝끝내 그 여인을 보내주어야만 했다. 지리산 눈 덮인 산 속, 대치의 품에서 하림의 옷을 덮고 떠난 여옥과, 죽어가는 대치를 바라보는 하림. 세 사람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없을 최고의 엔딩 장면이다.
그해 겨울 지리산 이름 모를 골짜기에 내가 사랑했던 여인과 내가 결코 미워할 수 없었던 친구를 묻었다.
그들은 가고 나는 남았다. 남은 자에겐 남겨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희망이라 이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이 이 무정한 세월을 이겨나갈 수 있으므로.
남겨진 자,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들.
대치의 말대로 하림은 그들이 떠난 이후에도 제대로 산다는 것이 힘든 한반도에서,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독백처럼 그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여옥이 없는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죽음보다 고통스러웠을 하림의 남은 생은 생각만으로 가슴이 아리다.
장하림.
잔혹한 전쟁터에서 끝끝내 인간이 지닌 존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
끊임없이 찢기고, 부서지면서도 조국의 평화를 염원했던 사람.
온전히 가질 수 없었음에도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늘 목숨을 걸었던 사람.
그의 세상은 그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지만, 그는 한결같이 희망을 찾았다.
그리고 여전히 이 땅은 그가 가졌던 희망을 필요로 하고 있다.
<여명의 눈동자>는 한국 드라마 역사에서도 길이 남을 작품이면서, 우리의 삶과 역사에 대한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는 작품이다. 25년 전 이 작품을 만들어 준 김종학 감독님-송지나 작가님 외 많은 스탭분들과 박상원님, 채시라님, 최재성님을 비롯한 모든 배우들의 노고에 감사와 경의를 전한다.
끝으로, 조국도, 원하는 삶을 선택할 권리도, 행복해질 기회도 없었던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참혹하고 무정한 세월을 견뎌야만 했던 그때의 모든 하림, 여옥, 대치에게 인사를 전해드리고 싶다.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포기하지 않아주어서, 끝까지 견뎌내 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 죄송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