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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아토르 May 16. 2016

잃어버린 상식을 찾아서

모래시계 (1995, SBS)

<여명의 눈동자>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니, 다음 차례는 당연히 <모래시계> 여야 할 것이다. 김종학-송지나 콤비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역작, <모래시계>.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시계>는 그야말로 한국 드라마의 양대 산맥이다. <여명의 눈동자> 이후 4년 만에 다시 뭉친 제작진이 만든 이 작품은 1995년 1월부터 2월 초까지 SBS에서 주 4회 방송되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짧고 굵게 방송되었던 이 드라마는 당시 '귀가시계'라 불리며,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60% 이상의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했다. 최민수, 박상원, 고현정, 이정재 등 주연배우들 역시 <모래시계>로 인해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모래시계>를 보지 못한 사람들도 그 유명한 <모래시계> 배경음악이나 '나 떨고 있니'라는 대사, 혹은 '모래시계 검사'라는 대명사로 다양하게 이 작품에 대해 귀동냥했을 것이다. 이렇듯 지금까지도 쉼 없이 회자되고 있는 <모래시계>는 <여명의 눈동자>와 더불어 최고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 만약 근현대사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이 두 작품을 연달아 보는 것을 추천한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대목들이 저절로 가슴에 아로새겨질 것이다.



80년대를 향한 고해성사

우석 : 80년 5월 난 광주에 있었어요. 계엄군이었고요. 그래서 난 검사 같은 게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진 돌아가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넌 잘할 수 있어 내가 알아. 난 평생 빚을 진 마음으로 살 생각이었어요. 빚 갚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면 되는 거라고.
선영 : 당신, 좋은 검사예요
우석 : 아니, 난 자꾸 잊어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잊어버리고. 잊지 말아야지, 생각하는 것도 잊고. 빚진 마음 같은 거 다 잊어버리고...

<모래시계>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 걸친 정치적, 사회적 사건들을 관통한다. YH사건, 5.18 광주 민주화운동, 삼청교육대, 슬롯머신 비리사건, 정치깡패 등등의 일들이 주인공 강우석, 박태수, 윤혜린의 삶과 촘촘히 얽혀 나간다. 무엇보다 <모래시계>는 80년대에 대한 고해성사로 읽힌다. 그리고 그 고해성사의 중심에는 80년대의 시작을 핏빛으로 물들인 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있다. 우석, 태수, 혜린의 삶 역시 80년 광주 이후 끝 모르는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80년대는 법과 상식 위에 돈과 폭력이 있는 시절이다. <모래시계>는 그 세월 속에서 잃어버린 상식을 복원하고자 노력하려는 의지로 점철되어 있다. 80년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은 그 의지를 끊임없이 환기하는 촉매로 작용한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 '바로잡아야 한다'는 신념을 <모래시계>는 끝까지 놓지 않는다. <모래시계>가 95년 작임을 생각할 때, 80년대를 지나온 지 불과 6년이 흐른 시점에서 이처럼 수준 높고 깊이 있는 회고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모래시계>는 그 이후의 많은 드라마에 의해 끊임없이 변주되고 차용되어 왔다. 올곧고 강직한 검사 강우석, 시대에 의해 폭력에 물들었던 박태수, 재벌가의 딸이라는 신분과 상식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윤혜린. 이들 주인공 세 캐릭터는 여전히 많은 드라마에서 비슷한 설정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모래시계>가 보여준 역사와 폭력에 대한 인식은 쉽사리 뛰어넘을 수가 없다.


<모래시계>는 드라마에서 가장 정의롭고 반듯한 강우석에게 80년 광주에서 계엄군의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그 부채감과 죄의식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며, 동시에 보는 이들에게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제3의 피해자들에 대해서까지도 생각할 여지를 마련해준다. 또한 사는 내내 폭력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박태수가 시대가 낳은 불운아이자 희생양임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으면서도, 끝끝내 그의 죄는 사하지 않는 단호함을 보여줌으로써 폭력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관철시키고야 만다. 


이러한 <모래시계>의 고집은 그 이후의 많은 드라마나 영화들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단순히 감성 호소를 위한 소재로 사용하거나, 쾌감을 위하여 폭력을 미화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을 생각할 때, 이 작품이 그들과 본질적으로 궤를 달리함을 깨닫게 한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

세상에는 상식이란 게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모두가 알고 있는 기준이 바로 상식입니다. 물론 상식대로 산다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세상이며 시대라는 점, 인정합니다. 사람들은 상식을 무시하고, 상식대로 살기 위해서는 때로 고통과 용기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피고인은 지난 30년간 살아오면서 여러 번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그때마다 피고인은 좀 더 쉬운 길을 택했습니다. 자신의 힘을 사용하고, 힘 있는 자 옆에 붙어서 지름길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상식대로 살고자 애쓰는 대다수 서민들의 희망을 꺾은 것이고, 그것이 피고인의 첫 번째 죄입니다. 본 검사가 피고인을 인지 수사하고 공판까지 하면서 줄곧 느껴온 것은 피고인은 과거의 잘못을 충분히 반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반성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 있어도 그 죄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상식을 지키기 위해섭니다. - 우석, 태수에게 사형을 구형하며     

<모래시계>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상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다. 이 작품의 주제의식이 형상화된 인물이 바로 검사 '강우석'이다. 그는 정의롭고, 반듯하고, 상식적이고, 도덕적이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 그러나 <모래시계>가 지향하는 세상에서 강우석 검사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강우석 검사의 아버지이다. 우석의 아버지는 우석이 평생의 신념으로 삼은 지침들을 가르쳐주는 분이다. 이를 테면, '옳은 것은 백 년이 지나도 옳고, 그른 것은 천년이 지나도 그르다'라는 상식적인 말, 혹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만 하면 된다'와 같은 도덕적인 교훈을 끊임없이 읊는다. 그런 우석의 아버지가 고위공직자나 교육자라도 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농사꾼이다. 그러나 일평생 나쁜 짓 하지 않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부지런한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 바로 우석의 아버지다.


<모래시계>가 지향하는 세상은 우석의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정당하게 돈 벌고, 억울한 일 당하지 않고, 가족들과 건실하게 살아나가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는 그런 '상식적인 세상'이다. <모래시계>에서 강우석은 군계일학이지만, 우석의 아버지는 다수의 평범한 국민들을 상징한다.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비합리적인 폭력과 동의할 수 없는 돈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그런 세상을 <모래시계>는 꿈꾸고 있다.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지만, 닿을 수 없는 두 친구

<모래시계>를 두고 '서로 다른 세계에 살았던 두 남자의 이야기'라고 많이 이야기한다. 그런 점에서 5회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상당히 상징적이다. 태수를 구하려다 사법시험을 치르지 못한 우석이 입대를 위해 고향에 내려와 있다 자신을 찾아온 태수를 기찻길에서 만난다. 자신 때문에 우석이 시험을 못 치렀다는 사실에 미안한 태수는 우석에게 무심히 "미안하다"고 말을 건네고, "시끄러" 하면서 짐짓 아무것도 아닌 듯 받아치는 우석의 모습은 둘 사이에 깊이 자리 잡은 우정의 무게를 실감케 한다. 그러나 달려오는 기차를 사이에 두고 선로 양쪽에 서있는 두 사람은 그들의 우정과는 관계없이 이제는 영원히 다른 길을 걸어야 할 이들의 운명을 보여준다. 누구보다 가까이 있고,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지만, 둘 사이에 기차가 달리는 한, 두 사람은 결코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것이다.

우석 : 검사가 바뀔 것 같다. 재판 도중에 이런 일은 별로 없지만 그렇게 될 거야. 어쩌면 너 조사 다시 받아야 할지도 몰라 성가시더라도 협조해줘.
태수 : 우석아.
우석 : 어.
태수 : 네가 해줘.
우석 : 싫어.
태수 : 너 힘든 거 알아. 아는데 네가 해. 나 너 알아. 너 같은 놈이 구형을 주면 나 납득할 수 있어. 너 말고 다른 놈은 못 믿어. 너 말고 다른 놈이 나서서 내 죄가 어쩌고 그래 봐, 나 속으로 그럴 거야. 웃기지 말고 너나 잘해라.
우석 : 나 광주에 있을 때 너 봤어. 그때 나 계엄군이었다. 몽둥이로 사람들 패고 총 들고 쏴댔어. 그때 넌 시민군이었고, 광주에서 죽었다는 니 후배 우리가 쏜 총에 맞았어. 나한테 속아왔어.
태수 : ...그 다음이 문제야. 그러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사는지. 하나는 너처럼 살고, 또 하나는 나처럼 산거야. 어이. 너 대단해. 진심이야. 우석아. 네가 해줘. 다른 놈은 싫다. 미안해. 

두 친구는 결국 자신들이 가장 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마주하게 된다. 친구에게 구형을 내릴 수 없는 우석은 자신의 치부를 고백하며 더 이상 검사일 수 없다고 한다. 그런 우석에게 태수는 말한다. “그다음이 문제야. 그러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사는지.” 그리고 말한다. “어이, 너 대단해. 진심이야.” 그것은 그 옛날 벽 없이 주고받았던 미안하다는 말처럼, 한 사람을 오롯이 이해하는 친구만이 해줄 수 있는 위로였다.



끝나지 않은 싸움


<모래시계>는 그렇게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강우석과 박태수의 삶의 결과를 분명하게 못 박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져야 할 상식'에 대해서 읍소하고 있다. 상식을 지키면서 살면 바보로 낙인찍히는 세상이라고 해도 그 모든 부조리와 폭력과 불의와 불합리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상식적이고 도덕적인 삶임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그리하여 결국 그 모든 비상식을 눈감았던 80년대를 똑똑히 직시하고, 잃어버린 상식을 찾기 위한 끝나지 않은 투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석 : 이제 그만 보내줘.
혜린 : 어디로.
우석 : 어디든. 여기 아닌 데로.
혜린 : 이 사람, 이렇게 보낸 걸로 뭐가 해결됐어?
우석 : 아직은, 아무것도.
혜린 : 그런데 꼭 보내야 했어?
우석 : 아직이라고 말했잖아. 아직은 몰라. 그럼 언제쯤이냐고 친구는 묻는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어쩌면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먼저 간 친구는 말했다. 그다음이 문제야. 그러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사는지. 그걸 잊지 말라고.

그다음이 문제다. 80년대가 끝나고 강산이 세 번째 변하고 있다. 우리는 그다음에 어떻게 살아왔는가. 이쯤 되면 가히 <모래시계>가 처절하게 부르짖는 '상식적인 사회'가 지금은 만들어졌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오늘날 상식적으로 산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시대가 되지는 않았는지. 도덕적인 사람은 손해보고 바보가 된다는 것이 만연한 통념은 아닌지. '정의'와 같은 가치가 촌스럽고 오글거린다는 이유로 외면받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석의 말대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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