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 (2015, tvN)
한창 <응답하라 1988>이 방영될 무렵, 90년대에 태어난 내게 88년도의 추억을 가진 어른들이 물었다.
"너도 응팔이 재밌니? 공감이 안될 텐데."
그러나 <응답하라 1988>은 90년대에 태어난 내게도 재밌었다. 심지어 세 편의 시리즈 중 가장 좋기까지 하다. 좋다는 건 재미있다는 것과는 다른 측면의 문제다. 재미로 따지면 응칠도 응사도 몇 번을 돌려 봐도 또 재밌다. 응팔이 시작하기 전엔 나도 의구심을 가졌다. 아무리 잘나간들 한 드라마의 세 번째 시리즈가 또 대박이 날까, 97년에 태어난 아이들이 수능을 보는 때에 88년이라니 너무 옛날이 아닐까. 그런 생각들. 그러나 나는 스스로의 의구심을 응팔 1회 만에 완전히 저버리고 이 드라마와 사랑에 빠졌다. 나를 사로잡은 장면은 다름 아닌 반찬배달 씬이었다.
이럴 거면 다 같이 먹어, 라는 정환이의 말처럼 쌍문동 엄마들은 어떻게든 이웃집에 반찬 하나 더 나눠주려 한다. 아들딸이 숟가락도 채 들기 전에 옆집에 음식을 전해주라고 재촉하는 엄마들이, 익숙하고 당연하게 반찬 그릇을 들고 집집마다 순회하는 아이들이, 찌개뿐이던 택이네 식탁에 반찬이 하나 둘 쌓이는 모습이 어떻게 따뜻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정말이지 영리하기 짝이 없는 응답하라 제작진은 시계를 더욱 거꾸로 돌린 대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그리울 것들을 전면에 세웠다. 가족 그리고 이웃을. 응팔엔 HOT에 환장하던 시원의 빠심도 없고, 이상민을 부르짖던 나정의 포효도 없다. 다만 가족과 이웃이 있을 뿐이다. 겪지 않았어도, 그 시대를 살지 않았어도 애틋하고 그리울 가족과 이웃이.
응팔의 감성은 80년대지만 지향하는 가치는 2016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데모하는 자식이 걱정되어 발에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뛰쳐나오는 88년의 엄마는 당연히 자식을 위해 각자의 모습으로 동분서주할 우리들의 엄마를 떠올리게 한다. 덕선이가 피켓걸로 TV에 등장하자 금메달 딴 듯 온동네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는 모습은 지금도 여전히, 어쩌면 더욱 필요할 연대와 정을 생각하게 한다.
88년의 쌍문동은 모진 소리하는 선우 할머니 때문에 선우 엄마보다 더 속상해하는 정봉 엄마가 있는 곳이다. 선우 엄마를 도우려 얼굴에 연탄재가 잔뜩 묻도록 연탄을 나르는 정봉이형이 있는 곳이다. 말하지 않아도 사정을 뻔히 알아 무안하지 않게 돈을 주고받는 끈끈한 엄마들이 밤낮 지켜주는 곳이다.
1년에 억을 버는 천재 바둑 소년에게 누구도 다정스레 묻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택이는 언제 엄마가 보고 싶냐고. 바둑기사이기에 앞서 18살 택이를 소년으로 봐주는, 그래서 그런 물음으로 위로를 줄 수 있는, 친구의 아빠가 있는 곳이 쌍문동이다.
그러니 응팔이 추억하는 것은 과거이지만 그리는 것은 미래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한 영원히 그리워할 것들에 대하여 응팔은 함께 노래했다. 세대나 나이는 중요치가 않다. 아이고 김 사장, 이라는 유행어가 유머 1번지에 나왔다는 것을 알건 모르건 상관없다. 단지 성균 아저씨와 덕선이가 유머를 주고받는 그 모습이 재밌고 정겨워 가슴이 뻐근해진다는 것. 그게 응답하라 1988에 2016년의 20대인 내가 응답할 수 있는 이유의 전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