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나처럼 키우고 싶다는 어른들에게 전하는 고백
나는 내 주변에서 자신의 딸을 나처럼 키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나 스스로도 그렇겠다 싶은 것이, 누가 봐도 모범생 스타일-그런데 실상 모범생은 아닌-에다가 이런저런 일들도 척척 해내는 '똑순이' 느낌이 강하니까. 기왕이면 당찬 딸로 키우고 싶은 마음에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닐까.
어른들이 봤을 때 잘 컸다는 인상을 많이 주는 나의 기원은 부모님으로부터 온다. 내가 자란 세대는 어릴 때 외벌이였다가 초등학교를 지나면서 맞벌이가 된 집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우리 부모님은 아버지가 외벌이를 하고 어머니가 집에서 자녀 교육에 온전히 집중하기로 했기 때문에 우리 집은 내가 중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몇 없는 외벌이 가정 중 하나였다.
엄마가 전업주부였기 때문에 나는 안정감 있게 자랐다고 느낄 때가 많다. 나는 늘 하교 후 집으로 돌아가면 집에서 엄마가 나를 반겨줬고, 나의 학교 이야기를 들어주고 항상 공감해주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3곳의 초등학교를 다니며 2번의 전학을 겪어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시절에도 큰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나에게는 정신적 지주 엄마가 있었으니까, 그땐 몰랐는데 모든 시절이 다 지나고 어른이 되니 알게 되었다.
고민이 있으면 엄마와 나누고 엄마는 나와 이야기를 나눴다. 틈만 나면 문을 걸어 잠그고 울던 나의 사춘기에도 엄마는 나와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는 입을 꾹 닫고 있던 나도 엄마가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이지, 나를 혼내려는 게 아니다라는 생각에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고 말로 옮기는 사람으로 변하면서 어른이 되었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 같은 모녀가 되었다.
나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다. 이 역시 부모님의 철저한 계획에 의한 것으로 자녀는 둘, 3-4살 터울로 낳겠다는 계획에 맞춰 정확하게 태어난 우리들이다. 딸들만 가득한 집안에 오랜만에 태어난 남자였던 내 동생은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부터 엄마들까지 많은 어른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물론 막내라인에 속했던 나도 어릴 때 엄청난 사랑을 받았지만 동생만 할까.
그런데 나는 동생을 미워하지 않는다. 뭐, 할머니가 남동생을 좋아해서 잘해주시는 만큼 동생이 받으면 부모님이 조금 더 챙겨주니까. 우리들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 누군가 동생을 챙겨준다니 좋은 거 아닌가? 어차피 부모님은 우리를 때로는 평등하게, 때로는 공평하게 키웠고 성별로 차별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어른들의 편애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바깥에 나가서 맨날 뛰어놀고 무릎이 까져서 돌아오든, 동생이 집에서만 놀고 소심하든 그게 너희 각자의 성격이고 스타일이니 그럴 수 있다고 했으니까. 덕분에 나도 동생도 남성/여성스럽다는 구분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고 나는 당찬 성격으로 자랄 수 있었다.
여태까지 설명한 것들이 '얻은 것'이라면... 이제부터 설명할 것들은 '잃은 것'이다. 내가 앞에서 설명한 것들을 얻었기 때문에 잃어야 했던 것들. 나, 그리고 동생은 '아빠'라는 존재가 희미하게 자랐다. 외벌이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이 2009년을 기점으로 어려워지면서 아빠는 사이드잡을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 집은 서서히 주말 가족-일요일 가족으로 변했고, 집에 올 시간도 부족했던 아빠에게 자식과 보낼 시간은 사치였다. 원래도 겨울을 제외하면 가족과 보낼 시간이 부족했던 아빠인데...
그나마 나는 여자였기 때문에 엄마와 함께 보내는 시간으로 마음을 위로하면서 살았다-내가 아예 괜찮다는 건 아니다-. 그저 집에 있는 무거운 물건은 엄마와 내가 나눠 들면 된다고 하면서 대충 아빠가 없어도 해결하는 법을 배웠고, 꼭 아빠가 필요한 일은 미루고 미루다 결국 없으면 안 될 때가 되어서야 해결된다는 거. 그리고 어른이 된 내가 결국 아빠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아빠를 따라서 같은 일을 하면서 마음속 빈자리를 함께 일하는 삼촌들로 채웠다는 거. 언젠가 아빠가 나이가 들어 돌아가신다 해도 추억도 사진도 남아있지 않을 거란 걸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런데 동생은 나와 달랐다. 그 애는 남자였고, 세상에는 아빠가 아니면 가르쳐 줄 사람이 없는 것도 있었다. 내 동생은 남자와 어울리는 법을 잘 모른다. 애초에 엄마랑 누나랑 어울리면서 자라온 아이였고, 그 성장 과정 속에서 그 애가 배운 건 여자들의 삶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 특성 때문인지 틈만 나면 반 남자 애들이 동생을 괴롭혔고, 키가 커져 남들이 괴롭힐 수 없을 때가 되어서는 친한 애들이 대부분 여자라는 게 보였다. 이제는 어른이 된 그 애한테 여전히 편한 사람은 나이 많은 여자 - 동갑내기 여자 - 나이 많은 남자 - 동갑내기 남자 순서다.
그 애는 가족이 다 함께 네 발 자전거를 타고 경포호수를 도는 게 소원이었다. 그 소원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고, 이제는 전동 스쿠터가 대세가 되었다-그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뜻이다-. 그 애는 아빠와 목욕탕에 가는 게 소원이었다. 이제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 애는 아빠와 나가서 캐치볼을 하고 함께 운동을 하는 게 소원이었다. 나는 그 소원을 조금이라도 이뤄주기 위해 동생과 자전거를 타고, 배드민턴을 치고, 캐치볼도 해줬다. 아빠와 딱 한번 배드민턴을 한 적이 있는데, 자식과 노는 게 서툴렀던 아빠가 그날 동생을 소원을 이뤄준 건지는 내가 동생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그런 아빠의 빈자리를 느끼며 산다. 당찬 내 성격도 그 빈자리 앞에만 서면 무너진다. 엄마가 수술을 하고 아플 때에도 아빠는 거기에 없었고, 성인이 된 나는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발버둥 쳤다. 이제 동생의 학교 다니는 이야기는 나만 안다. 그 애는 부모님한테 말하기를 포기해버렸으니까. 내 친구들은 다 안다, 동생에게 내가 0.7명 정도의 부모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반대로 나는 아빠가 우리를 돌볼 시간도 없이 바삐 살며 일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을 누리고 살았다는 것도 알고, 아빠의 삶이 그만큼 고단했을 것도 잘 안다. 그래도 만약 나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지금 같은 삶을 살지, 아빠가 돈을 좀 덜 벌더라도 가족과 함께하는 삶을 살지 고를 수 있었다면 나는 당연히 후자를 골랐을 거다.
내가 이렇게 잘 자랐던 건 부모님 덕분이지만
결국 나 또한 모든 걸 가지지는 못했음을
이 글을 빌어 고백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