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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귤 Oct 14. 2017

미국 PINK에 가니 '내 가슴'이 부끄럽지 않더라

브라 입은 걸 보여달라고?

직원: 다 입었으면 여기 벨을 눌러. 보러 올게~
(엥, 내가 속옷 입은 모습을 보러 온다고? 잘못 들었나?)
벨을 눌렀다. 정말 직원은 날 보러(봐주러) 탈의실로 들어왔다.


토론토 다운타운 이튼센터 PINK였다. 속옷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혹시 '화장품 파우치'가 있나 하고 들렀을 뿐이었다.

속옷계의 흥선대원군(은 나)


난 절대 속옷을 '속옷가게'가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왜냐고? 얽히고설킨 레이스와, 뜬금없이 두껍고 몰랑한 뽕 패드, 네온연두-형광핑크 속옷들이 망막에 찍히는 것마저 부끄러운 나는, SSIP선비다. 브.래.지.어.라는 단어마저 입에 올리기 불편한 나는, 씹선비다.


난 대형마트에서 속옷을 사곤 했다. 엄마가 대충 정해준(?, 그것도 중학교 1학년 즈음) 사이즈를 기억해두고 대형 마트에서 가장 무난한 디자인을 샀다. 그래도 불편함은 느끼지 않았다. 원래 이렇게 불편한 거지...라고 생각했을 뿐.


그래서 PINK에 가서도 속옷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찾던 파우치는 없었고, 이왕 들어온 김에 이 북미인은 대체 어떤 속옷을 입나 눈으로 대충 훑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안녕~! 이름이 뭐얌?"
"어, 안녕! 나는 수."
"반가워! 나는 레이첼. 혹시 뭐 찾는 거 있어?"
"(있을 리가 없지) 아 없어. 그냥 보는 중이야."
"응 오키. 나 여기 근처에 있으니까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응, 알았엉!(휴~)"
"아 혹시 너 가슴 사이즈 알아? 내가 바로 재줄 수 있어."
"(솔깃, 나는 사이즈를 재본 적이 없다)응 좋아!"

레이첼은 손에 들고 있던 줄자로 그 자리에서 가슴 사이즈를 재줬다. 부끄럽지 않았다. 매장은 널찍했고, 인구밀도는 낮았다. 아무도 날 주시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곳 직원들은 손에 하나씩 줄자를 가지고 다녔다. 나만 재는 게 아니었다.


정확한 사이즈를 알고 나니, 제대로 된 속옷 한번 사 볼까 싶었다.

"나 아무런 무늬 없는 브래지어 까만색이랑 누드색 골라줄래?"

그렇게 나는 PINK의 세계에 입문했다. 속옷 세계에 발을 들었다.


피팅룸에 들어갔다. 레이첼은 내가 원했던 속옷들을 가지고 왔다.


직원 레이첼: 다 입었으면 여기 벨을 눌러. 보러 올게~

(엥, 내가 속옷 입은 모습을 보러 온다고? 내가 영어를 잘못 들었나?)

탈의실 한쪽에는 불빛이 들어온 벨이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속옷을 입은 채고 벨을 누르라고? 내가 잘 들은 거 맞나? 괜히 속옷만 입고 불렀다가 변태로 몰리면 어떡하지?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씨 좀 부끄럽기도 한데.


아니 뭐 어때, 여긴 캐나단데. 어차피 또 볼 인간도 아니고, 내가 만약 틀렸어도 나는 외국인이니까 좀 덜 부끄러울 수 있을 거야.

큰 마음먹고 벨을 눌렀다.(솔직히 레이첼이 들어오다가 속옷만 입은 나를 보고 당황하며 다시 나가는 경우도 생각해뒀었다.)

정말 레이첼은 날 보러(봐주러) 탈의실로 들어왔다. 아주 친근하게.


"다 입었어? 보자. 음. 보니까 이 컵이 너한테 좀 작은 거 같네. 내가 한 치수 큰 거(아싸! 나 안 작다~ 자랑맞음.) 가져올게. 딱 기다려"


레이첼은 내 사이즈를 판단하고 다른 사이즈를 가져왔다. 20대 초반으로 보였던 레이첼은 아주 능숙한 직원이었다. 덕분에 난 부담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았다. 속옷을 가져와서는 내게 속옷 입기 팁까지 줬다.


"여기 끈에는 손가락이 하나 정도 들어가면 적당한 거고, 뒤에 후크는 아마 지금은 가운데에 끼면 될 거야. 나중에 입다가 혹시 늘어나면 맨 안쪽에 끼워. 그리고 컵은 틈이 없는 거 보니까 딱 맞네."


그래서 나는 생각지도 않은 브래지어 2개를 샀다. 레이첼은 이것저것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줬는데, 처음에 봤던 스타일보다 훨씬 몸이 예뻐 보이는 제품을 골랐다. 나름 '충동구매'였지만 사면서도 억울하거나 후회되지 않았다.


내 몸에 딱 맞는 속옷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이렇게 전문적인 도움도 처음이었다.


 

내가 속옷을 '야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해 왔다. 내가 매일 입는 옷인데 부끄러웠다. 이유가 있었다.

한국에서 속옷은 '남자에게 보여주는 그 무엇'이었다.


한국에서 유명한 속옷 브랜드 광고모델은 남자일 때가 많았다.(물론 세상이 변한 지금은 조금 다르지만)

(사랑해요, 오빠)
(당연히 사랑하죠, 오빠)


그런데 북미는 좀 달랐다. 광고를 비교해 봤다.


[PINK 유튜브 최근 동영상 목록]

#학교 #방학 #개학


[빅토리아 시크릿 유튜브 최근 영상 목록]

#건강 #여성 #사랑


[비비안 유튜브 최근 동영상 목록]

#몸매 #사랑 #가슴

[비너스 유튜브 최근 영상 목록]

#유방암 #글램탑 #이하늬(잉?)


과거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한국 광고는 '예쁜 가슴을 만들어준다', '고혹적인 섹시미로 남자를 사로잡을 수 있다'를 강조하는 경향이 컸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속옷 사는 나'를 부끄러워하는 내 마음: 헉 속옷 사러 왔다. 난 예쁜 속옷을 사서 남자를 꼬시려는 여자로 보이겠지...? 아닌뎅...뭔가 부끄럽지.*_*


반면 핑크는 '나는 활동적인 여학생이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난 운동하고, 내 목소리 내는 건강한 여성이다'를 보여준다고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속옷 사는 나'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마음: 속옷 사러 왔다. 몸에 맞는 속옷을 골라보자. 예쁘면 더 좋고. 솔직히 건강해야 내 몸도 더 예뻐지니까 운동도 좀 해야겠다.


그래서 PINK에서의 경험이 좋았다. 나는 내가 여자인 게, 아름다운 몸인 게 좋았다. 더 건강해지고도 싶었다.


한국에 돌아와 몸에 맞지 않는 속옷은 모조리 버렸다. 지금 입은 속옷은 몸에 챱챱 달라붙는 게 기분이 조크등여.


난 건강한 가슴을 추구하게 됐다.

고마워 레이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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