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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g Young Oct 17. 2019

밀라노에 세계 최강 한인 성가대가 있다

성악 유학 1번지 이탈리아에 사는 한인들

나는 노래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노래 속에 살다시피 한다. 차를 몰 때는 볼륨을 높여 노래를 듣고, 전철을 타서는 이어폰을 낀다. 노래를 들으며 잠을 청하기도 하고, 사무실에서도 집중이 필요하다 싶으면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으면서 집중을 시도하곤 한다.


좋아하는 TV 프로그램도 음악프로그램이 대부분이다. 지금은 종영된 '콘서트 7080'을 아직도 즐겨 찾아보고 있고, 가수 박정현이 출연하는 '비긴어게인 3' 이탈리아편을 몇 번을 돌려봤는지 모른다. 그리고 유튜브 '주현미 TV'에서 가수 주현미가 정겨운 옛 노래를 완벽하게 불러 젖힐 때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노래를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 정말이지 노래를 사랑하는 1인이다.


그래서였을까? 2016년 여름, 파바로티의 고향이자 성악을 배우러 대한민국 청년들이 가장 많이 유학 가는 나라, 이탈리아로 발령받는 행운을 잡았다.




중년 신사에게 노래를 부르라니...


밀라노에 도착해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교민, 주재원들과 어울려 골프를 쳤다.


늘 그렇듯 오늘은 잘 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고 시작하는 것이 골프다. 하지만 홀이 하나 둘 진행되면서 기대는 실망이 되고, 반복되는 실망은 또 체념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아쉬움을 남긴 채 끝나고 마는 것이 아마추어들의 골프다. 골프가 끝난 자리에는 잘 친 자의 우쭐댐과 못 친 자의 부러움이 잠시 교차하지만, 한 무리의 남자들이 어울려 들이키는 시원한 맥주는 이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청량제가 된다.


그날도 그랬다. 10여 명의 남자들이 모였다. 30대의 젊은 친구에서부터 50대 후반의 중장년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은 다양했지만 함께 골프를 즐겼다는 남자들의 단순하고도 유치한 유대감이 발동하면서 한여름밤의 시끌벅적한 뒤풀이 자리가 무르익어 갔다.


그때 갑자기 한 분이 누군가를 지목하면서 노래를 한 곡 하라고 했다. 탁 트인 야외이긴 했지만 근처에 이탈리아 사람들이 빼곡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족히 50대 중반은 돼 보이는 중년 신사에게 노래를 부르라니... 요청을 받은 중년 신사가 웃음 띤 표정으로 요즘 노래 안 한다며 거절했지만, 시키는 사람도 물러서지 않는 집요함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한국 골프장에서 벌어질 수 있을지 상상해 보자. 골프장이 아니라 어느 정도 기분을 내도 괜찮을 술집에서 조차 있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니던가? '지금 내가 함께 자리하고 있는 이 사람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요즘 노래 안 한다며 버티던 중년 신사의 입에서는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엄청난 음량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곡명이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약 3미터 거리에 있던 나에게 전해진 그 어마 무시한 노랫소리는 나의 고막을 지나 온몸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아 이게 성악가의 목소리구나!', '이렇게 가까이서 이런 노래를 듣게 되다니!'라며 감탄을 했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함께 자리한 한국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위의 이탈리아 사람들까지 가세한 박수였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비긴어게인 3' 이탈리아편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탈리아 교민 성악가들에 의해 이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날 밤 나는 비로소 내가 와 있는 곳이 대한민국 청년들이 가장 선호하는 성악 유학 1번지, 이탈리아 밀라노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2017 이탈리아 밀라노 한인 음악축제의 한 장면으로 스포르체스코 성에서 열렸고, 유튜브에도 올라 있음


내가 밀라노에 머물던 3년 동안, 교민들이 노래하는 모습을 목격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교민과 주재원이 어울려 1년에 한 번 진행하는 와이너리 투어의 오찬장에서는 말로만 듣던, 그래서 너무나 궁금했던 한 여성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조수미와 함께 공부했고, 조수미보다 노래를 더 잘했다는 소문이 돌던 분이었다. 성악가의 노래를 평가할 만큼의 능력이 내겐 없지만, 그렇다고 조수미 급의 노래를 못 알아들을 정도의 막귀는 또 아니다. 그 자리에 모인 약 50명의 교민들과 숨을 죽인 채 들었던 그분의 노랫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듯하다.



혹시 운이 좋으면 당신을 위해 즉석에서 노래를 한 곡 선사할 지도...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대략 4,500명 정도다. 밀라노 인근에 가장 많이 살고, 그다음이 로마다. 4,500명의 교민 중에서 유학생은 3분의 1에 해당하는 약 1,500명 정도다. 유학 분야로는 성악이 가장 많아 전체에서 50%가 넘고, 디자인, 미술이 그다음이다. 이것으로 짐작해보자면 지금 현재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은 800-1,000명 정도이다. 대한민국에서 노래 잘 부르는 젊은이들이 대거 이탈리아에 와 있는 것이다.


성악을 공부하러 왔다가 교민이 된 분들도 많다. 내가 잘 아는 분들 중에서도 무역을 하시는 분,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시는 분, 여행사 대표, 여행사 가이드, 현지 진출 우리 기업에서 근무 중인 분들 등 수도 없이 많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교민 10명 중 적어도 3-4명은 성악을 공부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그러니 혹시 이탈리아에 가서 교민을 만나게 되면, 그분의 직업이 무엇이든, 성악을 공부했거나 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예술가로 정중하게 대해주기 바란다. 누가 알겠는가? 혹시 운이 좋으면 당신을 위해 즉석에서 노래를 한 곡 선사할 지도....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타나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상이 있다. 바로 밀라노(로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교회가 보유한 한인 성가대가 세계 최강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라노에는 약 10개의 한인 교회가 있다. 매주 예배 보는 교인의 숫자가 200명이 넘는 큰 교회도 있고, 50여 명에 불과한 작은 교회도 있다. 그리고 교회마다 성가대가 있다. 성가대는 대략 30여 명으로 구성되는데 비전공자 배려 차원에서(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끼워주는 1-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악을 전공하였거나 성악을 한창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이다.


그래서 재미있는 일도 생긴다. 50여 명이 모인 교회에서 예배를 보다가 성가를 부를 시간이 되면 30여 명으로 구성된 성가대가 무대로 올라가고, 나머지 20여 명은 그 자리에서 성가대의 노래를 감상하게 된다. 웃기지 않는가?


아무튼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성가대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이 정도로 수준 높은 성가대를 가진 교회는 없을 것이다. 굳이 경쟁자를 찾는다면 시립 합창단 정도가 아닐까 한다. 이것이 밀라노에 세계 최강의 한인 성가대가 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매년 동네 주민까지 초청해서 개최하는 밀라노 한인교회 성가대의 연말 공연 모습


밀라노의 한 교회는 10여 년 전 교회 주위에 사는 이탈리아 주민들을 초청해서 성가대 공연을 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아서 지금은 반드시 해야 하는, 밀라노 한인 사회의 대표적 연말 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유튜브에서 '밀라노 한인교회 성가대'를 검색하면 그들의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2017년에는 한인회가 연말 행사의 하나로 각 교회의 성가대가 모두 참여하는 합동 공연을 마련하기도 했다. 교회를 안 다니지만 밀라노 한인 성가대를 경험할 좋은 기회다 싶어 구경을 갔었다. 서로 비교가 되는 무대여서인지 성가대마다 감동적인 공연을 준비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감상했다. 교회별 공연이 끝나자 무대와 옆 관중석까지 성가대가 가득 채운 상태에서 마지막 곡 할렐루야를 했고, 나를 포함해서 관중석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절정의 귀호강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2017 밀라노 한인 교회 성가대 합동 공연 모습
2017 밀라노 한인 교회 성가대 합동 공연 모습
2017 밀라노 한인 교회 성가대 합동 공연 모습




성악 공부를 위한 이탈리아 유학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보면 지금까지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공부한 한국인의 숫자는 수만 명에 달할 것이다. 그중에는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하고 있는 성악가도 많지만 이탈리아에 남아 교민으로 살며 여전히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많다. 노래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탈리아에서 노래를 벗 삼아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분들과 3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호흡할 수 있었음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으로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탈리아로부터 배우고 교류할 것이 성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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