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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집가 Jan 15. 2024

따라 하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요?

#6_손민수하며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면


부끄럽지만 중학생 때 난 오전에 두 번, 오후에 세 번 정도 삐지는 사람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내게 충분한 관심을 주지 않아서라고 어렴풋이 기억한다. 


나는 김 씨 가문의 3대 독자 까지는 아니지만, 사랑이 많은 가정에서 10년 넘게 막내로 군림하며 조부모를 비롯한 온갖 친척들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유치원 다닐 무렵엔 TV장 위에 올라가 웅변학원에서 배워온 이야기들을 조잘댔고, 중학생이 되어서도 명절이면 가족들 한가운데에 서서 원더걸스의 Tell me, 소녀시대의 Gee 춤을 추었다. 


관종과 인싸 기질이 흘러넘쳤던 내게 친구들의 관심은 부족하기만 했다. 셋이 걸을 때면 늘 가운데에 서야 직성이 풀렸고, 나를 빼고 매점이라도 갔다 오면 며칠을 토라져 말도 안 했다. 순하고 착하기만 했던 친구들은 쪽지를 쓰거나 우리 집 앞에 찾아와서 내 화를 풀려고 노력해 줬다. 삐져 있을 때 주는 관심이 좋았는지 나의 삐진력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식판 그릇을 긁었다고 (소리에 예민했어요,,,), 밥 먹을 때 똥 얘기 했다고 (비위가 약했어요,,,), 나랑 다른 반에 배정됐다고 (이건 정말 반성합니다....) 등등 이유는 붙이기 나름이었다. 


이 못된 습관은 새로 사귄 친구 S 덕분에 말끔히 고쳐졌다. 그녀는 내가 삐져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전까지 '내가 삐진다->친구들이 풀어준다->못 이기는 척 봐준다'가 공식이었지만, 그녀를 만난 후에는 '내가 삐진다->아 그래? 우린 딱히 잘못한 거 없는데?->아무도 날 안 풀어주니, 머쓱하게 혼자 풀고 다가간다'가 되었다. 이런 당황스러운 일을 몇 차례 겪은 뒤에는 삐질 일에도 삐지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 삐지지 않아도 친구들이 충분한 관심을 주는 사람.


그 시절 S는 우리 모두가 겪는 사춘기에서 벗어난 사람 같았다. 감정 기복도 없고, 늘 너털웃음을 지으며 주변 사람들을 편하게 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는 몰래몰래 그녀를 따라 했다. 누군가 나를 찾아오면 반기고, 떠나가도 서운한 티를 내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내게 감정은 말로 내뱉는 순간 그 농도가 더 진해진다는 것을. 슬픔도 우울함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더 심해진다. 반대로 속으로 삼키면 옅어진다. 별 일 아니라 생각하면 별 일 아니게 된다.


지금의 나는 서운한 게 언제였더라 곱씹어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S를 손민수 하기(따라 하기) 성공했다. 하루에 다섯 번 삐질 때보다 편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사소한 일에 집착하고 파고들기보다는, 먼 풍경을 볼 수 있는 지금이 좋다. 웹툰 치즈 인 더 트랩의 손민수는 주인공 홍설을 부러워하고, 따라 하고, 그녀처럼 되고 싶어 하다가, 결국 자기 자신을 잃을 정도의 상태가 되어 욕먹는다. 현실의 나는 부러워하는 사람을 마음껏 따라 할 테다. 좋아 보이는 것만 쏙쏙 골라서 더 나은 나를 만들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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