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지기가 꿈 입니다
연남동 골목골목 개성 있는 독립서점들을 둘러보았다. 대형 서점의 어디서 본 듯한 서가와는 달리 책방지기의 취향이 마음껏 드러난 서가를 구경할 수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책방은 저마다의 매력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머물게 한다. 하루의 서울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떠올린 책방 리스트만 100곳이 넘는 나의 취미는 책방 여행이다.
홍대입구의 번잡함을 피해 들어간 골목에서 마주친 첫 책방은 진부 책방 스튜디오다. 문학과 예술을 다루는 서점으로 책장 가득 얇은 시집이 빼곡하다. 시인의 시집뿐 아니라 수필집, 알려지지 않은 소설과 자서전까지 덕질을 하기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시인과의 낭독회, 시인의 서가 등 문인들과 함께하는 활동이 많다. 시기를 잘 맞추면 저자 사인본까지 구할 수 있다.
시는 문학의 결정체라 생각한다. 에세이 한 권, 소설 한 권으로 담아내는 생각을 시인은 한 문장, 한 편의 시로 정제해 발표한다. 존경하는 시인의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진부 책방에서 나와 주황색 기와집에 핀 능소화 몇 송이를 보았다. 여름 한 철 주황의 생기로움을 뿜어낸 꽃이 정말 아름다웠다. 연남동 골목을 거닐다 보면 자그마한 정원을 낸 작은 카페와 아기자기 귀여운 소품샵도 많이 있다.
두 번째로 간 곳은 번역가의 서재. 이 곳은 현직 번역가 박선형 씨가 운영하는 작업실 겸 번역서 큐레이션 서점이다. 작은 외부 계단을 통해 2층 서점으로 들어오면 햇살을 가득 머금은 큰 창이 있다. 반듯한 서가에 넘치지 않고 절제된 책들이 꽂혀있다. 좋은 번역서를 소개하고 싶어 시작한 서점에서 내 서재처럼 편안하게 머물다 가시라는 책방지기의 마음이 잘 담겨있었다.
맑은 날 창가에 앉아 핸드드립으로 내린 커피와 함께 책을 읽고, 글도 썼다. 커피 머신이 없어 고요한 분위기에 잔잔한 연주곡이 흘러나와 편안해졌다. 처음 와본 공간이지만 낯설지 않고 기분이 좋았다.
언젠가 책방을 차리고 싶은 꿈이 있다. 하지만 나보다 책도 많이 읽고 식견이 깊은 사람도 많을 텐데, 내가 모르는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어쩌지? 최근 몇 년의 짧은 독서력으로 책방을 차려도 될까? 책 전문가처럼 안 보일 텐데 누가 책을 사가지? 온갖 고민이 끝없이 따라왔다. 책 읽는 인구는 점점 줄고, 이미 잘 되던 서점도 망해가는 판국에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게 두려워 질질 끌고만 있었다.
어제 읽은 책에서 이 문장이 나에게 왔다. 평소 자기계발서는 나에겐 와 닿지 않아라며 담쌓고 지내다 우연히 읽은 김미경의 리부트라는 책이었다.
왜 사람들은 남들과 동시에 같은 출발선상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늦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왜 시작도 하지 않고 미리 패배감을 갖는 걸까. 내가 무언가 결심하고 시작한 날을 첫날로 보면 안 될까? 남들의 첫날과 나의 첫날을 비교하는 건 출발에 지장만 줄 뿐 내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래서 책이 좋다. 나도 모르게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 생각지도 못한 책으로부터 각자의 문장으로 나에게 답을 준다. 뒤쳐졌다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하면 다를 거야'라는 마음으로 시작해보자. 당장주의자가 되어보자.
하루의 서울 첫날,
좋아하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생각을 하며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