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 제철은 가을이지만, 내 종아리에 달린 무는 사계절 모두 오동통하니 어찌 된 게 늘 제철이다. 와이드 팬츠의 유행 덕분에 요즘은 다리를 덜 미워하게 됐지만, 학창 시절엔 커다란 무를 알타리 무로라도 줄이려고 맥주병으로 문지르고, 이상하게 생긴 링을 끼고 다니며 괴롭혔다. 그때 내가 가장 바란 건 좋은 대학교도, 멋있는 남자친구도 아닌 평지에 있는 집이었다.
내가 살던 곳은 벽산 아파트. 아파트에 브랜드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그러니까 평지에 있는 어떤 벽산아파트를 보기 전까지는 당연히 절벽과 산의 줄임말로 알고 지냈다. 관악산 끄트머리에 있어 집에서 교문보다 등산로가 더 가까웠던 그곳에서 인생의 절반을 살았다. 학교를 갈 때도, 학원을 갈 때도, 하다못해 떡볶이를 먹으러 갈 때에도 가파른 경사로를 건너야 했으니 종아리가 두꺼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용돈 받은 날은 하굣길에 마을버스를 타 힘겹게 등산하는 친구들을 몰래 놀리는 게 그 시절 작은 사치였다.
고립이라고 봐야 하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한 동네에서 다니면서 사귄 친구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셋넷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벽산아파트 1단지에 사는 친구들. 3단지, 5단지에 사는 애들과 잠깐 친해지기도 했지만 매일 만나 놀기엔 거대한 언덕이 있어 우리는 우리끼리만 어울렸다. 고만고만한 형편에 비슷한 환경이라 우리의 부모는 모두 일을 나갔고, 그들이 떠난 빈 집을 오가며 서로의 엄마가 차려둔 음식을 먹었다. 남극탐험, 팩맨, 테트리스 같은 유치한 게임을 했고 조금 더 커서는 서로 숙제를 킬킬대며 베꼈다. 어른이 되면 크게 바뀔 줄 알았지만 그대로였다. 집에서 테트리스 하는 대신 밖에서 맥주를 들이켜는 정도.
물론 동네 밖에서 만나보려고도 해 봤다. 예쁘게 차려입고 당시에 핫플레이스인 가로수길, 홍대에도 나가봤으나 뭔가 낯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서로의 어리숙한 화장을, 곱슬곱슬 화려한 머리를, 딱 봐도 불편해 보이는 높은 구두를 놀려댔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우리는 다시 편한 슬리퍼를 신고 펑퍼짐한 잠옷을 입고 아파트 상가의 쪼끼쪼끼로 모였다. 또래들은 조금 더 반짝거리는 강남에 갔는지, 그곳에서 20대는 우리뿐이라 남자친구와 싸우고 엉엉 울기에도, 회사에서 더러운 꼴을 당해 시원한 욕을 하기에도 편했다.
서로 다른 대학을, 회사를 다니며 따로 놀다가도 결국 쪼끼쪼끼에서 만나던 날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마지막 쪼끼쪼끼는 신혼집을 포천이라는 멀고 먼 곳에 마련한 친구 J가 남편을 소개해주는 자리였다. 친구를 빼앗아갔다는 얄미움보다는 가까운 누군가 처음으로 결혼한다는 낯선 설렘이 가득했다. 스무 살부터 빨리 결혼하고 싶다며 어린 남자친구들을 닦달하던 J는 스물여섯에 결혼했다. 남은 우리는 마음의 준비를 넉넉하게 했다고 생각했지만 슬리퍼가 아닌 구두를 신은, 목 늘어난 티셔츠가 아닌 반짝반짝 드레스를 입은 그 애를 보곤 또르르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는 몇 달 전부터 약속을 잡아야만 볼 수 있는 걸 몰랐기에 망정이지, 알았다면 좋은 날 뿌앵 울며 다 보낼 뻔했다.
J가 벽산 아파트를 떠났다. 셋이라 넉넉하다며 좋아했던 테이블은 둘이 되니 황량하게 느껴졌다. 치킨에 골뱅이를 시키면 많았고, 하나만 시키면 허전했다. 남은 우리도 쪼끼쪼끼로 가는 발길이 뜸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이사를 했다. 그토록 바라던 평지다. 지하철도 가깝고 조금만 달리면 한강인 완벽한 동네지만 대부분 집에만 있다. 완벽한 동네에 딱 하나 없는 동네친구. 그 하나를 위해서 가파른 경사를 오르고, 튼실한 종아리를 얻었으나 후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