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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조 Nov 12. 2019

낯선 도시로 용감하게

열 번째



새벽부터 암트랙의 허무맹랑한 결제시스템과 씨름하며 기차표를 끊었다. 내년 초 겨울, 포틀랜드에서 출발해 뉴욕까지 가는 3박 4일짜리 여정이다.


원래 계획은 시애틀에서 뉴욕으로 가는 것이었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타려고 점찍어둔 Empire builder노선은 자리가 넉넉했는데 갑자기 오늘 새벽에 들어가 보니 모든 침대칸이 전부 매진이었다. 안 돼!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날짜와 시간을 조율해보려 노력했지만 어떻게 해도 시애틀에서 출발하는 Empire builder노선은 전부 매진이었다. 그럼 노선을 바꾸면 되잖아? 아니, 안된다. 나는 꼭, 무조건 겨울 기차를 타고 눈 덮인 풍경을 보고 싶다. 그러려면 캐나다와의 국경 가까이로 주행하는 북부의 노선이 필수인데,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노선은 Empire builder뿐이다. 


Empire builder노선이 출발하는 도시는 특이하게도 두 군데다. 보통 하나의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노선들과 다르게 두 개의 도시에서 각각 출발한 열차가 한 군데서 만나 연결되어 나머지 구간을 주행한다. 그 두 개의 도시중 하나는 시애틀이고 다른 하나는 포틀랜드다. 포틀랜드. 어딘지 이름은 낯익긴 한데 사실 무슨 주에 붙어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Empire builder를 포기 못한 나는 포틀랜드 발 뉴욕 행 좌석을 혹시나 하고 찾아봤고 결국 마지막 남은 침대칸을 발견한다. 이렇게 된 이상 이 마지막 남은 침대칸은 운명이 점지해준 수준이다. 나는 포틀랜드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대뜸 표부터 끊었다. 


대충 구글맵에 포틀랜드를 찾아보니 시애틀에서 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한국에서 직항 비행기는 없고, 시애틀에서 환승해서 가는 경유 편만 존재한다. 워싱턴 주와 오레건 주의 경계쯤에 위치하고…그 정도가 내가 아는(혹은 구글맵으로 알아낸) 전부다. 그리고 애플스토어가 하나 있다. 흠, 별로 큰 도시는 아닌가 보다(참고로 나는 애플스토어의 개수로 도시의 크기와 번화함을 어림잡는 근거 없는 버릇이 있다). 


포틀랜드가 워싱턴 주에 붙어있든 오레건 주에 붙어있든 상관없이 어쨌든 나는 포틀랜드에 가게 되었다, 팔자에도 없이. 가끔 이렇게 생판 모르는 도시에 가게 될 때가 있다. 그러면 그에 대비하는 나의 자세는 그냥 텅 빈 머리로 가는 것이다. 가장 주된 이유는 귀찮음이고 두 번째 이유는 별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가 가본 적 없는 도시에 대해 예습을 철저히 해서 계획을 세워봐야 그런 건 다 와장창 무너지기 마련이고 계획이 박살날 때의 피로감은 무지해서 겪는 해프닝에 비하면 더 심각하기 마련이다. 한때는 여행 떠나기 전에 갈 곳들을 가이드북에 빼곡히 표시하고 아침 점심 저녁 식당까지 지정해놓는 강박적인 여행자였으나 이젠 모든 것을 놔버렸다. 역시 체력과 정신력이 점점 퇴보하면서 사람은 타협을 하는 법이다.


차라리 모르면 용감하기라도 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물론 체력적으로 말도 안 되는 루트를 짜게 될 지언정 다 어떻게든 헤쳐나가게 되어있다. 그리고 때론 그런 무모함이 뜻밖의 즐거움을 선사할 때도 있고 말이다. 


어쩌면 철저한 사전조사 없이 가서 내가 놓치는 엄청나게 많은 것이 있겠지만 그냥 나와 인연이 아니었겠거니 생각하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아등바등 시간 단위로 가야 할 곳을 정해서 다니기엔 너무 낡고 지친 사람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뭐 언젠가 또 올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어디든 미련을 좀 남겨둬야 다시 돌아가게 된다는 말을 나는 굳게 믿는다.


그래서 아마 포틀랜드에 대해 아는 거라곤 거기가 요즘 자주 언급되는 힙한 도시라는 것뿐인 상태로 그 도시에 발을 들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정처 없이 구글맵과 헤매게 되겠지. 내가 다른 모든 낯선 도시에서 그랬듯이 그럼에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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