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여행객이란 으레 촌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다.
여행지에서 산 싸구려 원피스나 셔츠, 지역 특산물 액세서리 따윌 걸치고 목엔 카메라를 맨 채 두리번대는 것이 영락없이 얼굴에 여행객이라 써 붙인 듯하다. 계산대 앞에서 그 나라의 화폐를 어색하게 주섬주섬 꺼내는 모습에선 타지인의 면모를 절정으로 보인다. 가끔 여행책자에서 익혔을 그 나라 말로 더듬거리며 '고맙다' 혹은 '안녕' 따위를 열심히 중얼대고.
물론 나도 그런 촌스러운 여행객 중 하나다. 아니고 싶지만 그럴 순 없다. 모든 사람들은 대체로 타지에서 촌스러워질 수밖에 없지 않나? 내가 모르는 도시에서 모르는 언어가 머리 위로 정신없이 오가고 생전 만져본 적도 없는 모양의 지폐 같은 걸 열심히 세다 보면 고향에서 얼마나 능숙하고 세련되게 살았는지 따윈 아무 문제도 아니게 된다. 낯선 곳에서 미어캣처럼 고개를 쭉 빼고 두리번대며 간혹 열렬히 사진을 찍어대는 모습은 필연적인 풍경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여행객이 되는 것이 나쁘기만 하냐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예를 들면 아침 여덟 시부터 술집을 찾아갈 때. 한국에서라면 대낮부터 야외 테라스에서 술이나 마시며 빈둥대는 걸 한량이라고 부를 테고 여기의 언어에도 그에 상응하는 호칭이 있을 테지. 하지만 여행객에게는 여행객만의 면죄부가 있기 마련이다. 성실하게 일상을 꾸리지 않을 권리, 아침부터 술을 들이켜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권리가 여행객에겐 있다. 나는 그런 권리를 누리는 것이 여행객이 되는 촌스러움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믿는다.
얼마 전에 여행을 갔던 다낭은 휴양지여서 그런지 보통 저녁에나 열 법한 바나 술집들이 환한 대낮부터 부지런히 문을 열고 있었다. 나는 아침식사만 하고 숙소를 빠져나와 술집으로 직행하곤 했다. 단골 바도 만들었다. 체 게바라의 얼굴 아래 ‘혁명’이라고 적힌 포스터가 붙어있고(그렇다. 이곳은 공산주의의 나라다.) 남미의 분위기를 흉내 내 노란 페인트를 칠한 야외 테라스를 가진 근사한 곳이었다. 칵테일을 스무 종류쯤 파는 데다 아침 여덟 시에도 술을 마실 수 있다. 칵테일 맛은 그저 그렇지만(술을 넣긴 했나?) 마셔줄 만하고, 커피가 진해서 좋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면서 글이나 쓰고 책이나 읽는다. 아무도 나에게 공적인 연락을 취하지 않고(물론 취한다고 해서 받아주지도 않을 것이다), 할 일 같은 것은 여행지까지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 그러니 오후에는 관광지에서 일행의 사진이나 찍어주고 촌스러운 관광객 노릇을 좀 한다고 해서 그리 손해 보는 것 같진 않다. 그 촌스러움도 권리라면 권리 아닌가. 그 촌스러움이 낯선 곳에서 순진하게 굴 권리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