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집에 돌아와 보니 택배함이 꽉 차있다.
10월이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소비를 줄이기로 다짐했었다. 생필품과 식료품같이 필수적인 것들을 제외하고는 돈을 쓰지 않기로. 그런데 왜 택배함이 가득 차있는가 하면, 책이다. 책과 책들과 또 책들. 책은 나에겐 사치품보단 필수품에 가까우니까 당연히 소비를 금지할 순 없었다.
풍선효과라고 하나, 옷과 가방 따윌 사지 않게 되니 돈이 남고 그 돈으론 유일하게 소비가 허락된 품목인 책을 더 많이 사게 된다. 역시 하나를 줄이면 또 다른 하나가 늘어난다. 일종의 질량 보존의 법칙—소비총량 보존의 법칙?—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부지런히 인터넷 서점을 들락거리며 장바구니를 야금야금 비웠다. 독서 모임에서 읽는 책도 사야 했고, 갑자기 사고 싶은 소설이 생각이 났고, 신간이 나왔고, 마침 중고매물이 싸고 괜찮은데… 핑계 없는 무덤 없다더니 그렇게 열 권의 책이 우리 집 택배함을 가득 채운 것이다.
피곤해 죽겠는 와중에도 신이 나서 택배를 뜯고 맛보고 즐기는 시간을 가진다. 중고로 산 책들은 상태가 괜찮고, 약간의 욕심으로 산 양장본의 두꺼운 책들은 만족스러운 무게감으로 일단 나를 행복하게 한다(다 읽을 걱정은 나중에!). 나는 책을 읽는 것보다 책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책의 물성은 손 안에서 나를 한없이 뿌듯하게 한다.
그러나 책들을 한 아름 안고 방으로 들어와 깨달은 것은 책장에 자리가 없다는—전혀 새롭지 않은—사실이다. 저번에 알라딘 중고 판매로 한 무더기를 팔았는데도 자리가 나는 듯하다가 또 새로운 책들로 꽉 채워져 버렸다. 일단 책상 한편에 새 책들을 쌓아두고 책장을 어떻게든 정리해보려고 애쓴다. 읽은 책들은 다른 방으로 옮기고 읽어야 할 책들만 꽂아두자고 작정했는데도 책장엔 빈자리가 도무지 나질 않는다.
그 얘기인 즉, 사두고 읽지 않은 책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다. 책을 사고, 그것의 표지를 잠시 만끽한 후에 곧 읽겠노라 심약한 약속을 하고 꽂아둔 뒤 펼쳐도 보지 않은 책들이 한가득이었다. 세상에. 족히 백 권은 되겠는데.
갑자기 위기감이 들어서, 그럴 때면 으레 그렇듯 새로운 다짐 하나를 주섬주섬 세운다. 일명 있는 책 해치우기. 있는 책들을 다 읽기 전에는 (독서모임용 책을 제외하곤) 새 책을 사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새 책이 사고 싶어서 있는 책을 열심히 읽지 않을까?
사놓고 안 읽은 책이 얼마나 되는지 순전히 궁금해서 엑셀에 책들을 정리해봤다. 정확한 숫자는 부끄러워서 아무한테도 말 못 할 것 같다. 어쨌든 한국 출판업계에 기둥까진 못되어도 벽돌 몇 개정도만큼 기여했다고만 해두자.
책을 정리하다 보니 갑자기 예전에 읽은 오카자키 다케시의 <장서의 괴로움>이 다시 읽고 싶어 졌다. 분명 책을 샀던 것 같은데 책장을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다. 습관적으로 다시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책을 담다가 번쩍 정신을 차린다. 이럴 때가 아닌데! 읽지 않은 책에 짓눌려 살면서 <장서의 괴로움>을 또 사서 어쩌겠다는 건지.
어쩌면 이 책들을 다 읽는데 삼 년이고 오 년이고 걸릴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이 든다. 그래도 부지런히 읽고 팔아치우다 보면 책장에 볕 들 날이 오겠지. 부디 내가 빠른 시일 내에 서점에 다시 발을 들일 수 있기만을 기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