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처음 미국으로 이민을 왔을 때, 신랑과 나는 당장 집을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막 이민을 와서 직업도 없던 우리가 아파트 같은 걸 구해 매달 월세를 내는 것도불가능했다. 다행히 시어머니 댁에 우리가 따로 지낼 공간이 있다고 해서 직장을 잡고 안정될 때까지 그곳에서 지내기로 했다.
3층짜리 커다란 집엔 시어머니와 새시아버지 두 분만 살고 있었다. 2층과 3층은 두 분이 사용하시고, 우리는 본 건물의 1/3 정도 크기로 만들어진 1층을 사용했다. 출입구가 따로 있었던 1층에는 방 하나에 욕실 하나, 그리고 커다란 거실과 주방, 사우나가 있었다. 두 사람이 지내기에 충분히 크고 좋은 곳이었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참고로 시부모님은 신랑이 중학교를 다닐 때 이혼 하셨다. 시어머니는 재혼을 하셨고, 시아버지는 여전히 혼자 지내고 계신다.
완전히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고, 시어머니와 새시아버지가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니었다. 시부모님을 위해 내가 요리를 한다거나, 의무적으로 두 분이 지내는 곳을 청소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시댁이란 단어가 주는 선입견과 압박감 때문에 마음도 편치 않았고, 괜스레 눈치도 보였다.
그런 나를 향해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건 바로 시어머니였다. 방 안에 처박혀 공부만 하고 있으면 강아지들과 산책을 가자고 부추기기도 했고, 연극이나 영화도 함께 보러 갔으며, 요가도 함께 다녔다.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출신의 시어머니는 거리낌 없고 직설적인 성격이라 나와 너무 잘 맞았다. 가끔 와인 한 병을 다 비울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기도 했고, 보드게임을 하기도했다. 7년이 지난 지금은, 친언니가 있다면 이렇게 지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시어머니와 나는 격이 없는 사이가 되었다.
이런 시어머니께 본받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기견을 대하는 어머니의 자세이다. 대형 유기견 8마리를 키우는 시어머니는 유기동물 구조 단체에 지속적으로 후원을 하고 계시고, 유기견들이 평생 집을 찾기 전에 임시로 보호하는 일도 하고 계신다. 유기견들 중엔 학대나 여러 가지 사정 등으로 공격적 성향을 가진 경우가 많은데, 시어머니는 그런 개들까지 임시로 보호하며 행동을 교정하려 애쓰신다. 그렇게 시어머니 집에서 임시로 보호되었다가 천사견으로 탈바꿈되어 평생 집을 찾은 개들이 내가 알기로만 벌써 수십 마리이다.
강아지 훈련이나 훈육 등에 관한 건 전문가 못지않은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시어머니 덕분에 처음 만두를 키우기 시작할 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또한, 시어머니의 영향으로 유기견이었던 하나도 입양할 수 있었다. 동물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시어머니에겐 말도 5마리 있는데 말들에게도 정말 지극정성이다. 절로 존경심이 솟아오를 정도로 말이다.
시어머니와 강아지 8마리, 그리고 시어머니 무릎에 앉은 만두
아이엘츠 시험에 통과하고 난 뒤, 내가 아이오와 대학병원에 합격하면서 우리는 아이오와 주로 이사를 했었다. 하지만 간호사 면허 이전에 문제가 생기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미네소타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아이오와로 가지 않은 것이 정말 천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그 사이 시어머니와 새시아버지는 살고 있던 집을 팔고 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한적한 곳으로 이사를 가셨다. 차선책으로 우리는 시아버지 댁으로 들어갔다. 시아버지 집도 3층짜리 집이라 3층 전체를 우리가 쓰면 된다고 했다. 계획대로 집을살 돈을 마련할 때까지 시댁에 조금 더 신세를 지기로 한 것이다.
경찰서장으로 오랫동안 일을 하다 은퇴를 하신 시아버지는 어떻게 이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상하신 분이다. 함께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시아버지는 우리를 배려해 주셨다. 장난기도 심해 둘이서 끊임없이 유치한 장난을 치기도 했는데, 특히나 초콜릿과 아이스크림을 두고 벌리던 치열한 신경전은제법 긴장감이 돌기도 했었다.
시아버지께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다운 힐 스키를 배웠다. 생전 처음으로 얼음낚시를 해보기도 했다. 장롱면허였던 내 도로연수를 해준 것도 시아버지였고, 아이오와로 이사를 가고, 다시 돌아오는 모든 과정을 도와준 사람도 시아버지였다.
이런 시아버지는 우리가 결혼을 할 때, 도자기로 빚은 코끼리 동상과 신랑의 어린 시절 사진들을 모은 사진첩을 내게 선물했었다.
어릴 적, 행복한 기억이 별로 없는 나에게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동네 친구 Y와 절에 놀러 갔었던 것이다. 그때 주지 스님이 부처님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책을 선물로 주셨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본 책 선물이었다. 수백 번도 넘게 그 책을 읽어서 인지 나는 유난히도 코끼리를 좋아한다. 특히나 하얀색 코끼리는 무척이나 신성시 여기며 좋아하게 되었다. (어금니가 여섯 개인 흰 코끼리는 불교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석가모니의 모친인 마야부인이 태몽으로 여섯 개의 상아가 달린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기 때문이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흰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신랑에게 했고, 그걸 신랑이 시아버지에게 말해준 듯했다. 시아버지는 한국으로 오기 전, 몇 날 며칠을 인터넷을 뒤져 겨우 마음에 드는 코끼리 동상 하나를 살 수 있었다고 했다. 하얀색을 사고 싶었으나 흰색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고도 했다. 어렵게 구한 선물이 혹시나 깨질세라 몇 겹을 싸고 또 싸서 한국까지 가져와 결혼식 전날 나에게 건네주셨다. 신랑의 어린 시절 사진들로 채워진 사진첩과 함께 말이다. 사진첩은 시아버지의 짧은 손 편지로 시작했다.
아버지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에게서 받아본 첫 선물이었고, 첫 손 편지였다. 그 선물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아마 시아버지는 다 알지 못할 것이다.
코끼리를 받아 들고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겨우 참아냈다. 시아버지가 내 어린 시절을 위로하는 것만 같아 감정이 복잡하게 소용돌이쳤다.
이 코끼리와 사진첩은 할머니 염주 다음으로 내게 소중한 물건이다
시아버지와 나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시어머니 댁에서 1년 반, 시아버지 댁에서 1년 반, 총 3년을 시댁에서 살았다. 단 한 번도 엄마와 살아본 적 없었던 내가 친언니 같은 시어머니와 1년 반을 살았고, 아빠를 떠올리면 폭력과 폭언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던 내가 친구 같은 시아버지와 1년 반을 살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