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일한 지 20년 정도 된 경력직 간호사 한 명이 정맥 주사 팀으로 부서 이동을 했었다. 병원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지만 원내에서 평판도 좋지 않았고 일도 못해서 1-2년마다 부서를 옮겼던 사람이었다.
우리 팀원들 모두 그 간호사의 부서 이동에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연차가 낮아도 정맥 주사 경험이 많고 평판이 좋은 간호사로 채용할 것을 매니저(한국으로 치면 수간호사)에게 부탁도 했지만 매니저는 끝내 우리의 말을 무시했다. 자신이 오래전에 그 간호사와 같이 일을 했었는데 자신에게 잘해줬었고, 평소에도 자주 만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내가 속해있는 병원이 노조에 가입되어 있기 때문에 병원 내 공고가 나면 연차가 높은 간호사 순으로 고용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 부서 특성상 연차가 낮아도 정맥 주사 경험이 더 많다면 매니저의 재량으로 연차가 낮은 간호사를 고용할 수도 있었다.
결국 매니저의 독단으로 그 간호사는 우리 팀으로 부서 이동을 했고,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맥 주사를 잘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경력직이라 따로 배울 것이 없다며 잘못된 테크닉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였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방에게 명령하고 지시하는 듯한 말투와 무례한 언행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팀원들과 마찰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환자와 보호자에게 심각하게 불친절하다는 것이었다.
한 번은 그 간호사가 케모포트(Chemo Port)가 있는 환자에게 포트 니들(Port Needle)을 삽입하러 갔다가 환자와 싸우는 일이 발생했다. 일주일에 두 번 항암을 받는 환자는 포트를 자주 사용하다 보니 피부가 벗겨지고 헐어서 많이 아프다며, 그날은 그냥 팔에 정맥주사를 꽂아줄 것을 부탁했다. 항암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수혈을 받으러 왔으니 정맥 주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이유였다. 정중한 환자의 부탁에 그 간호사는 불같이 화를 내며 혼자의 의견을 무시했다. 결국은 우리 팀원 중 다른 간호사가 환자에게 정맥주사를 꽂아주었고, 그 환자는 울면서 매니저에게 전화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니저는 그 간호사를 따로 불러 면담만 한 번 했을 뿐 별다른 처벌을 하지 않았다.
그 간호사가 우리 팀에서 일을 시작한 지 3개월쯤 되었을까, 그녀와 데이 근무를 같이 하게 되었다. 내가 점심을 먹으려고 전날 동료들과 배달시켜 먹고 남은 중국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있던 그녀가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뭐냐고 물었다.
"소피! 뭐 먹는 거야? 냄새가 너무 좋은데?" "어제 병원 건너편에 있는 중국 식당에서 시킨 거야. 너무 많아서 내일까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아! 거기 Chopstick이라는 식당?" "응. 거기." "거기 말고 다른 중국 음식점 아는데 없어?" "음... West Duluth 쪽에 DMV(차량관리국) 있잖아. 그 옆에 중국 식당이 하나 있는데 거기도 나쁘지 않았어." "식당 이름이 뭔데?"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이름이 중국어였던 것 같아."
미간을 찡그린 그 간호사가 말을 이었다.
"기억해내봐! 왜 이름이 기억이 안 나? 거기서 먹어본 적 있어서 말한 거 아냐? 근데 왜 식당 이름이 기억이 안 나?"
3개월을 같이 일했지만 여전히 적응 안 되는 그녀의 말투였다.
"기억이 안 날 수도 있지. 구글로 검색해 봐. 식당 이름이 기억이 안 날 뿐만 아니라, 안다고 해도 중국어라서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모르겠어." "중국어인데 왜 발음을 모른다는 거야?!!"
어이없는 질문에 순식간에 화가 났다.
"왜냐하면 나는 중국 사람이 아니니까. 나는 한국 사람이라서 중국 말을 몰라!"
인상을 구긴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에서 음성인식을 활성화시키더니 내 입 앞에 갖다 대며 대뜸 소리를 내질렀다.
"말해! 말해! (Say it!! Say it!!)"
나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말했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식당 이름 기억이 안 날 뿐만 아니라, 나는 중국어 발음을 못한다고. 나는 중국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라고!"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맞받아쳤다.
"아이씨, 귀찮아. 내가 검색을 해야 되잖아."
뒤쪽에서 앉아 있던 다른 직장 동료가 정색을 하며 그 간호사에게 말했다.
"너 당장 그만둬! 소피가 한국인이라는 거 알고 있으면서 중국어를 발음하라고 강요하는 이유가 뭐야? 식당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고도 말했고, 중국어를 모른다고도 말했잖아! 너 이거 인종차별이야!"
그녀는 그 직장동료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이게 무슨 인종차별이야? 입 닥쳐!"
그리곤 밖으로 나가버렸다.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는 나를 동료가 달래주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신랑과 강아지와 함께 바로 산책을 나갔다. 눈 덮인 산책로를 걸으면서 신랑에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신랑이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걸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산책로에 쌓인 사방의 눈이 다 녹아내릴 정도로 열을 내던 신랑은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소피. 내 말 잘 들어. 너 오늘 병원에서 인종차별을 당한 거야. 절대로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야."
미국으로 이민 오던 날, 시카고 공항에서 입국 검색을 하던 흑인 직원에게 인종차별을 당한 이후로 그때가 처음이라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또한, 직장 내에서 인종차별을 당해 본 것도 처음이었기에 어떤 방법으로 일을 해결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행히 일주일 동안 오프여서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고, 신랑과 대화도 충분히 나누었다. 그리고 같은 부서에서 일하던 노조 위원장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 후, 직장 내 인종차별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나는 오프가 끝나고 매니저를 찾았다. 매니저에게 그때의 일에 대해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말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매니저는 별것도 아닌 일로 찾아왔냐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해서 유감이긴 한데... 내가 그 간호사랑 알고 지낸 지 꽤 오래됐거든! 걔 그런 사람 아니야. 내가 장담하건대 그런 의도로 말한 거 아닐 거야. 네가 오해한 거야."
그때 그곳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자신과 친하다는 이유로 중대한 문제를 등한시하고 방관하는 매니저의 태도에 화도 났고, 설명하기 힘든 상처도 받았다. 매니저와는 말이 안 통하겠다는 판단에 얼른 대화를 마무리하고 다시 노조 위원장과 면담을 했다. 노조 위원장은 매니저의 태도에 격분해서 HR(Human Resources, 인사부)에 사건을 보고 하라고 나를 격려했다.
솔직히 말해서 HR까지 가고 싶지 않았었다. HR에 보고하면 복잡한 절차를 거치느라 면담을 하기까지 최소 몇 달은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매니저의 입회 하에 그 간호사에게 사과를 받고 넘어가려 했었는데, 매니저의 대응과 태도를 보고 난 뒤 복잡해도 할 건 해야겠다고 마음을 바꾼 것이었다.
역시나 HR은 시간을 질질 끌었다. 혹시나 미국에서 일을 하다가 부당한 일을 당해 HR에 보고할 일이 생긴다면 꼭 명심해 두 길 바란다. HR은 당신의 편이 아니다. 그 누구의 편도 아닌 병원, 회사의 편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두길 바란다. 아무튼 길고 긴 인내의 시간이 지나고 약 3개월 뒤, 그 간호사와 매니저, HR 직원 두 명, 노조 위원장, 그리고 나, 총 6명의 미팅이 있었다.
굉장히 딱딱하고 불편한 자리였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란 생각에 하고 싶었던 말도 전부 다 하고사태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설명했다.
미국에 있는 모든 아시아인들을 중국인 일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인종차별이라는 것과 한국과 중국은 엄연히 다른 나라이며, 언어 또한 매우 다른데 그 정도의 기본 지식도 없이 나에게 무례하게 군 그 간호사에게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그리고 중대한 문제를 안일하게 받아들였던 매니저 때문에 이렇게 HR에 보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며 매니저에게도 사과를 요구했다.
두 사람은 그런 것이 아니라며 궁상맞은 변명을 해대다 결국 나에게 사과를 했다. 미팅 후 그 간호사는 인종의 다양성과 문화 차이에 관한 교육 프로그램을 들어야 했고, 매니저는 윗선에서 내려온 리더십 교육을 들어야 했다고 했다.
그 후, 그 간호사와 매니저와 껄끄러운 관계가 지속되었지만 이미 HR 입회 하에 사과를 받았으니 더 이상 그 일에 관해 말을 해서는 안 됐다. 나는 잠자코 내 할 일을 했고, 그 간호사는 여전히 무례하게 굴며 나를 무시했으며, 매니저는 은근히 나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8개월 정도가 지나고 인종차별을 했던 그 간호사가 일을 그만뒀다. 정맥 주사 팀에 입사한 지 6-8개월 차에 미드라인(Mildline) 트레이닝을 받는데, 짧게는 하루, 길게는 삼 일이면 마칠 수 있는 트레이닝을 그 간호사는 6개월 동안 이수하지 못한 것이다. 6개월을 질질 끈 것도 모두 그녀의 베스트 프렌드였던 매니저 때문이었다. 그 간호사가 사직서를 내던 날 매니저는 정맥 주사 팀 간호사실로 뛰쳐 올라와서 모두를 향해 욕을 했다고 했다. 우리가 너무 못되고 가혹하게 굴어서 그 간호사가 그만둔다며 팀원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매니저는 정맥 주사 팀뿐만 아니라 내과 병동의 매니저이기도 했는데, 그곳의 간호사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2-3일 정도 출근을 하는데 출근 시간은 대부분 10시나 11시, 그리고 퇴근은 오후 2시나 3시에 해버렸고, 병동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 스태핑 문제나 스케줄, 급여 문제 등, 제대로 처리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원에 출근하지 않는 이유도 각양각색이었다. 본인이나 아이들의 병가, 강아지가 아프다, 강아지를 잃어버렸다, 집에 물이 샌다, 등등... 작년 매니저 평가에서 최악의 평가를 받았음에도 그녀의 행동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2년 정도를 내과 병동과 정맥 주사 팀의 매니저로 일을 하면서 자신에게 불만을 표하거나 반기를 드는 간호사들을 꼭 집어서 보복을 하기도 했다. 직설적이고 불만을 표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정맥 주사 팀원들 대부분이 그 앙갚음의 대상이었고, 나 또한 인종차별 사건 때문에 태움의 대상이었다.
약 두 달 전, 병원이 새 건물을 짓고 이사를 했다. 이사 후 혼동과 같은 변화 속에서 매니저는 여전히 근무 태만이었고 연락이 안 될 때도 많았다.
새 건물로 이전을 하고 매니저를 본 것이 딱 세 번인데, 그중에 한 번은 지난여름에 있었던 은퇴 파티였다. 생각해 보라. 당신이 간호사인데 수간호사를 두 달 동안 병원에서 스치듯 딱 두 번 보았다면... 병동이 어떻게 돌아갈지.
매니저의 방관으로 정맥 주사 팀은 아직까지 지정된 간호사실, 즉 오피스와 물품 보관 장소가 없다. 모든 물품과 카트, 비싼 장비들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보관되어 있어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물론 그녀가 관리하던 내과 병동도 엉망진창이라고 들었다.
새 건물로 옮기고 난 뒤, 나를 포함해 정말 많은 간호사들이 CEO를 비롯해 윗선에 직접 이메일을 보내 불만을 표했고, 그것 때문에매니저는 CNO(간호부장)로부터 경고와 같은 질책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변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리더의 자질이 없던 매니저가, 인종차별 사건을 등한시하며 방관했던 그 매니저가, 10월 10일, 화요일, 오전 8시 40분, 해고를 당했다. '해고를 당했다'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시 말하겠다. 그 매니저가 10월 10일, 화요일, 오전 8시 40분, 회사에서 '짤렸다'. 이제야 통쾌하다. 맞다. '짤렸다!!!'
그녀가 매니저란 자리에서 어떻게 2년이나 있을 수 있었는지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못한다. 능력도 없고, 게으른 사람이 그렇게나 오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여러 가지 루머가 돌고 있지만 확인된 사실도 아니고, 이곳에 쓰기에도 부적절한 것들이 대부분이라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아무튼, 현재 정맥 주사 팀은 축제 분위기이다. 다음 매니저로 내정된 사람은 그 매니저의 밑에서 온갖 일을 다 도맡아서 하던 슈퍼바이저이다. 매니저보다 더 많은 일을 했던 사람이고 일도 똑 부러지게 잘하는 사람이라 나름 기대가 된다. 어찌 되었든 그동안 우리 팀원들 정말 고생 많았다. 당분간은 이 축제 분위기가 이어질 것 같다.
There will be a time when loud-mouthed, incompetent people seem to be getting the best of you. When that happens, you only have to be patient and wait for them to self destruct. It never fails. -Richard Rybolt
목소리만 크고 무능한 사람들에게 뒤지는 느낌이 들 때가 올 것이다. 그럴 때에는 인내심을 갖고 그런 사람들이 자멸할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리처드 라이볼트
지난 2년 동안 내게 힘이 되어준 글귀이다.
인종차별을 했던그 간호사의 무례함과 무식함에, 능력이 없던 매니저의 게으름과 나르시시즘, 자질 부족과 무지함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