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phi Perich Jul 10. 2023

미국에서 난폭운전에 대응하는 방법

Road Rage


지난 2월 17일. 12시간의 데이 근무(아침 7시부터 저녁 7시 30분까지)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주유등이 들어와서 병원 근처에 있는 주유소를 들렀다.

미국의 주유소는 한국처럼 주유소 직원들이 나와서 기름을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모두 셀프 주유이다. 대부분의 주유소는 주유 기계에서 바로 카드 결제를 하고 주유를 할 수 있지만, 간혹 매장 안에서 얼마만큼 주유를 하겠다고 먼저 결제를 하고 난 뒤 주유를 할 수 있는 매우 번거로운 주요소도 있다.

아무튼 조금 위험한 동네라 잠시 망설이기는 했지만 저녁 7시 반이라 너무 늦은 시간도 아니었 또 다음 날 데이 근무였기에 집에 가는 길에 주유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언덕 위에 있던 주유소를 들른 것이다.

천천히 주유소로 들어가 주유대 옆에 정차를 했는데 갑자기 아주 수상스러운 차량 한 대가 내 앞에 나타났다. 번호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번호판은 찌그러져 있었고, 엉망으로 긁힌 앞 범퍼는 한쪽이 떨어져 나가 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인 은회색의 쉐비 세단이었다. (미국에서 이런 차량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혹시나 만나게 된다면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다.)

내 사선 앞으로 나타난 그 운전자는 나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욕을 하고 있었다. 차 안이라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미친놈인가 생각하며 가만히 쳐다보니 그 운전자는 작정이라도 한 듯 내 주유대 반대편으로 자신의 차를 대곤 계속 나를 향해 뭐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흐릿해서 잘 안보이지만 확대해서 보면 남자가 나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데이 라잇 세이빙 타임 때문에 시간이 8시 30분으로 표시되었다)


자, 여기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모르는 운전자가 따라와서 욕을 하고 자신의 차를 당신의 차 옆에 정차하고 당신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100에 100은 바로 그 자리를 뜬다 일 것이다. 더군다나 미국에서 말이다. 하지만 한 성격 하는 하는(?) 나는 '미친놈이 지랄하네!'라는 생각으로 시동을 끄고 밖으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따라 내린 그 운전자는 차마 이곳에 글로 적을 수 없는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욕, 특히나 인종과 성별에 따라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 있는데, 그 절대로 안 되는 욕과 말들이 모두 그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

철저하게 남자를 무시하고 주유 기계에 카드를 넣고 주유를 시작했다. 그 남자는 갈수록 과격한 말을 쏟아부었고,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나도 남자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한국말로 말이다. 가 미국 욕을 퍼부으면 나는 한국 욕으로 응수를 하겠다는 이상한 애국심으로 목청을 높여 찰지게 욕을 했다.

남자는 내가 그렇게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듯 잠시 주춤거리더니 나를 때리기라도 할 듯 주먹을 들어 올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주머니에 든 페퍼 스프레이를 ON으로 돌려 당장이라도 뿌릴 준비를 하곤 주유대 사이를 넘어온 남자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노려보았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갑자기 미간을 설핏 찡그리더니 재킷 안에 입고 있던 내 유니폼으로 시선을 옮겼다. (미국에선 한국에서처럼 사복을 입고 출근해서 간호사 유니폼으로 갈아입는 것이 아니라 유니폼을 입고 출퇴근을 한다.) 간호사 유니폼을 확인한 남자는 슬쩍 뒷걸음을 치더니 휙휙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곤 곧장 자신의 차를 타고 떠나버렸다.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손이 덜덜 떨렸지만 끝까지 주유를 다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 일을 신랑에게 말해주었고 신랑은 진심으로 기겁을 하며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했다. 참고로, 미국은 한국에서 처럼 앞뒤로 블랙박스를 탄 차량이 드물다. 내가 사는 곳은 아예 없다고 봐도 좋을 만큼 말이다. 우리는 3년 전 가족들이 음주 뺑소니 사고를 당한 적이 있어서 따로 블랙박스를 사서 차에 달았는데 내 차에는 앞쪽에만 블랙박스가 있고 뒤쪽에는 없다.

여러 번 영상을 돌려본 신랑은 흔히들 말하는 로드 레이지(Road Rage)를 내가 당했으며 그런 상황에서 차에서 내려 주유까지 한 나의 행동에 대해 엄청나게 혼을 냈다.(혼이 나도 싸다고 생각한다.) 


주유등이 들어와도 한동안 운전이 가능한데 꼭 그렇게 위험한 동네에 있는 주유소를 갔어야 했냐... 우리 집 근처에서 주유를 하면 되지 않았냐... 남자가 총을 가지고 있었음 어쩔 뻔했냐... 뭘 믿고 그렇게 용감하냐... 


한참 동 잔소리를 한 신랑은 병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가장 가까운 경찰서를 찾아서 구글지도에 즐겨찾기로 저장해 주었다.


그리고는 위와 같은 상황이 생기거나 난폭운전을 당했다면 무조건 가까운 경찰서로 차를 몰라고 했다. 그리고 911에 전화를 해서 내가 지금 난폭운전을 당하고 있으며 어느 어느 경찰서로 가고 있는 중이다, 내 차량 번호는 무엇이고 나를 뒤따르는 차는 차종이 무엇이고 차량 번호가 무엇이다를 말해주면 된다는 것이었다.(미국은 경찰이 필요한 상황이나 응급상황에서 모두 911에 전화를 하면 된다.)




혹시나 미국에서 운전을 하다가 난폭운전을 당했다면 절대로 나처럼 하지 말길 바란다. 나처럼 겁 없이 차에서 내렸다가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다. 그리고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미국엔 과격한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정말로 존재한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막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별종들이 정말로 있으니 내 몸은 내가 사려야 하는 것이다.

신랑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서 무턱대고 맞서 싸우려고 했는지 깨달았다.

몇 번이고 동영상을 돌려보던 신랑은 내가 주유소로 우회전하기 위해 속도를 줄이자 뒤에서 따라오던 그 남자가 자신도 속도를 줄여야 하니 갑자기 화가 나서 주유소 옆의 샛길로 자신의 차를 몰고 들어와 나를 해코지한 것 같다고 했다. 차 안에 앉아 있는 내가 동양인 여자라는 사실에 더욱 나를 얕잡아 보고 더욱 과격해졌는데 예상과는 달리 내가 쉽게 겁을 먹지 않아 슬쩍 당황했고, RN이라는 아이디를 단 유니폼을 입은 나를 보곤 괜히 건드렸다가 일이 복잡해지겠다고 생각하곤 자리를 뜬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혹시 당신이 미국의 어느 곳에 처음 정착을 했다면 동네나 직장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이 어디인지, 가까운 Urgent care가 어디인지, 그리고 가까운 경찰서가 어디인지를 제일 먼저 확인해 두길 바란다.


타국에서 아프거나 위험한 순간이 생기면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말이다. (당연히 당신의 회사에서 적용하는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병원으로 가야 한다. 미국은 한국처럼 국가에서 제공하는 의료보험이 아니기 때문에 기업이나 개인이 사보험에 가입을 하게 되는데, 그 보험회사에서 지정한 병원이 아닐 경우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을 수 있다. 그러면 정말 큰일 난다. 의료비 정말 비싸다, 정말로.)

그리고 난폭운전을 당했다면 나처럼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마음으로 덤비지 말고 경찰서로 직진하자.


푸른선은 내가 운전을 한 경로이고 노란선은 상대방이 운전을 한 경로이다.


한국처럼 고화질의 영상은 아니지만 주유소로 우회전해서 들어간 나를 뒤쪽에서 따라오던 남자가 빠르게 샛길로 빠져 주유소로 들어온다.(영상에는 샛길로 빠지는 건 찍히지 않았지만 하도 요란하게 과속으로 달려서 내가 고개를 돌려 쳐다봤었다.) 차 시동을 끄면 녹화도 중단되기에 영상은 중간에서 끊긴다.




도서 구입: 종이책 & 전자책 종이책은 빠른 배송이라 웹사이트에 보이는 것보다 빨리 받으실 수 있습니다. (당일배송 또는 1 ~ 3일 이내로 바로 발송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머리카락을 기부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