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이팅게일’
<2021년 첫 영화>
치고 나쁘지 않았다. 아무런 정보 없이, 전혀 기대하지 않은 것에 비해 오히려 괜찮았다. 비록 조금 답답하고 루즈하나, 많은 메시지를 담고자 했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에 성공했다.
<차별>
영화는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1825년의 태즈메니아를 배경으로 성 차별, 인종 차별을 말한다. 남성 아래 여성, 백인 아래 흑인, 영국인 아래 아일랜드인, 일반인 아래 죄수. 철저한 계급으로 나뉘어진 사회 속에서 인물들은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하고, 또 자신이 무시를 당한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아래 계급의 누군가를 무시한다.
<폭력>
차별로부터 기인하는 폭력은 눈 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잔인하고 악하다. 특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하는 장면들을 견뎌내는 것은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었다. 클레어가 여러 차례 겁탈당하는 장면, 동시에 남편과 아이를 잃게 되는 장면, 원주민 흑인 여성이 겁탈당하는 장면, 군인들이 눈과 손으로 클레어를 성추행하는 장면.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클레어와 빌리를 도와주던 노부부의 남편이 아내에게 ‘shut up, woman.’이라 소리치던 장면까지도 차별과 폭력은 영화 모든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땅을 박탈당하고, 살해당하며, 인간 대접받지 못하는 노예이자 백인들의 장난감으로 취급당하는 모습은 분노와 박탈감을 넘어 무력감까지 느끼게 한다. 자신들이 살아가던 터전을 잃고, 가족과 친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백인들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혹은 심심풀이로 벌레 죽이듯 살해당하는 원주민들의 심정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경험>
호주에서 1년을 보낼 때 원주민들을 본 적이 있다. 백인들의 땅이 되어버린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빈민가 형태의 마을이 있었고, 노숙인 행색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그들은 원주민이고,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기 힘들어 나라에서 지원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안타깝다는 마음만 들던 당시와는 달리, 밀려드는 분노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세상의 이치에 대한 저항감이 뒤섞여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술 발전이 더디고, 신문물을 받아들이기보다 전통과 풍습을 지키며 살았다는 이유 하나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원주민들은 2016년이 되었음에도 차별 속에 살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백인들에게 빼앗긴 채.
해외여행을 적지도 많지도 않게 다니면서 인종차별을 겪은 적이 한 번 있다. 난생처음 해보는 자유여행이라 들뜨고 설레며 긴장했던 프라하의 스타벅스에서,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영어로 주문을 하던 그때, 가소롭다는 듯 비웃으며 내 주문을 받던 그 백인 남자 직원과 나의 주문을 방해라도 하겠다는 듯 그 남자 직원에게 계속해서 장난을 걸던 백인 여자 직원들. 춥고 긴장되어 안 그래도 조그맣게 응축되어 있던 자존감은 무참히 짓밟혀 울컥 눈물이 났다. 다른 모든 이에게는 묻던 “Do you need a receipt?” 한마디를 나에게 묻지 않았고, 영수증에 쓰여있는 화장실 비밀번호를 몰라 다른 무료 화장실을 찾아 헤매야만 했다. 처음 당하는 인종차별에 모멸감과 당혹스러움으로 휩싸여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던 그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다행히 그 뒤로는 동양 여자라는 이유로 많은 환대를 받았지만, 이것 또한 그저 그들이 가진 환상과 호기심에서 기인한 친절이라 여겨질 뿐이었다.
그 뒤로 여행했던 다른 나라들에서 많은 친절과 호의를 받고, 호주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따뜻한 배려를 받은 뒤, 모든 백인들이 인종 차별 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가끔 그것들도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친절은 아니었을까, 하는 괜한 피해망상을 가지기도 한다.
일본에서 일 년 반을 지내는 동안 같은 동양인들 사이에서도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인 주제에(?) 한국인들을 향해 던지는 은근한 무시는 백인들이 주는 차별보다 더욱 불쾌하고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중국인이나 동남아인을 무시하거나 더럽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에, 무의식 속에 관습화 된 차별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가졌는지 알게 된다.
결국, 차별과 폭력은 여전히 공기처럼 우리 주변 모든 곳에 존재한다.
<치유>
이 영화에서 치유는 곧 자연이고, 노래이자 춤이고, 전해지는 전통 의식이다. 자연 속에서 다른 생명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치유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이름이 비롯된 검은 새 망가나를 보며 순수하게 기뻐하는 빌리, 하나의 죽음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 마음으로 연기를 피워 치르는 의식, 고운 목소리로 옛 영국 노래를 부르는 클레어, 대위가 된 호킨스를 따라가 폭력 대신 노래로 복수를 행하는 클레어, 모든 것이 끝나고 해가 뜨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들의 마지막 뒷모습. 폭력 앞에 놓인 비폭력의 평화는 얼마나 경이로운지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