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늙어야 한다’는 말이 남긴 것들
요즘 우리는 노화를 이야기할 때, 종종 이런 말을 쓴다.
“그래도 잘 늙어야지”
“관리하면 달라”
“운동하면 덜 늙어”
이 말은 위로처럼 들린다. 하지만 한번쯤은 이 말들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진 적이 있지는 않은가.
‘잘 늙어야 한다’는 말에는 기준이 숨어있다. 잘 늙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관리한 노화와 관리하지 못한 노화, 노화는 어느새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평가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평가의 끝에는 은근한 결론이 따라붙는다.
잘 늙지 못한 건, 어쩌면 본인의 책임일지도 모른다는 것
앞선 글에서 우리가 노화를 얼마나 빠르게 ‘늙었다’는 두려움의 언어로 바꾸어 왔는지를 이야기했다. 사회가 학습시킨 시선, 에이지즘 ageism이라는 이름의 편견, 의학과 제도의 언어. 이 모든 것이 겹치면서 노화는 피해야 할 상태가 되었고, 두려움은 개인의 몫으로 옮겨졌다.
이번 글에서 다루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노화가 어느 순간부터 ‘잘해야 하는 일’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여기서 잠깐!
여기서 말하는 노화의 정상은 더 아프고, 더 느리고, 더 불편해지는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뜻은 아니다. 노화는 고통을 정상화하는 과정이 아니라, 변화가 생겼을 때, 그 변화를 무시하지 않고, 조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과정에 가깝다. 이 글은 노화를 체념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노화를 다른
기준으로 다시 보자는 이야기이다.
노화를 잘해야 하는 일로 바라보면, 몸의 변화는 조정의 신호가 아니라, 실패의 징후처럼 느껴진다. 조금 느려진 걸음, 예전 같지 않은 회복, 자꾸 신경 쓰이는 통증들, 이 모든 것이 “내가 관리를 못해서” 생긴 일처럼 읽히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몸을 이해하기 보다, 몸을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노화는 잘하고 못하는 일이 아니다. 노화는 시간이 몸에 남긴 흔적이고, 그 흔적은 사람마다 다른 속도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어떤 몸은 속도를 줄여야 하고, 어떤 몸은 방향을 바꿔야 한다. 이 차이는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조건의 차이다.
‘잘 늙어야 한다’라는 말이 특히 위험해지는 순간은 이 기준이 비교의 언어로 작동할 때이다. 덜 아픈 노화, 덜 느린 노화, 덜 불편한 노화만이 정상으로 남는다. 그 결과, 조금 아프고, 조금 느리고, 조금 불안한 몸은 곧바로 ‘관리 실패’가 된다. 이때 사람들은 몸을 돌보기보다 몸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나는 노화를 성취의 문제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 노화는 극복해야 할 대상도, 관리 성과로 증명해야 할 결과도 아니다. 노화는 삶이 스스로를 조정해가는 과정이다.
노화를 실패로 보지 않게 되면 질문이 달라진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가 아니라, 지금 이 몸으로 어떻게 더 안전하게 살아갈 것인지,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조정해야 하는지.
이 질문들은 노화를 줄이는 질문이 아니라 삶을 다르게 운영하는 질문이다.
이렇게 노화를 ‘조정해 가는 과정’으로 보기 시작하면, 운동도, 돌봄도, 삶의 리듬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조정은 몸에서는 어떻게 나타날까. 다음 글에서는 노화된 몸이 왜 이전과는 다른 전략을 선택하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약해짐’이 아니라 다른 우선 수위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 이 글은 ‘노화와 몸, 그리도 다른 방식의 삶’을 주제로 한 연재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