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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Feb 06. 2022

어쩌다 마흔

방어회는 죄가 없지

아까 먹은 방어회가 아직 명치끝에 걸려있다. 이젠 회마저도 소화가 잘 안 되는 건가, 나이 앞자리가 바뀌고 나서는 아주 작은 일들에도 애꿎은 나이가 소환된다. 나이 탓을 해버리고 싶어 핑계를 찾는 사람처럼. 스트레칭할 때마다 곡소리를 내면서도, 남편이랑 이야기하다 갑자기 단어가 생각이 안 나 입안을 맴돌 때도. 그러나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도 뻣뻣 몸치였고, 스물몇 살 때부터도 소화력이나 기억력은 그다지이었는데. 마흔(아, 해가 바뀌었으니 이제 마흔한 살)이라는 나이가 주는 무게감이 벅차 자꾸만 곱씹게 되는 걸까. 아직 내가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방어회가 아니라 내 나이가 아닐까.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라고 애써 외면하다가도 십 대가 된 딸아이의 톡 쏘는 한 마디, 함께 찍은 사진 속 엄마에게서 발견한 외할머니의 얼굴, 어쩌다 며칠 야근하면 온 몸에 표가 나버리는 나의 저질체력과 마주할 때면 이제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과는 조금씩 멀어지는 듯한 기분, 옅은 두려움이 한 번씩 올라오곤 했다. 그리고 이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던 일들도 이젠 쉽게 할 수 없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은 오래전 내가 꿈꾸던 마흔의 나는 지금보다 더 단단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에게도 딸에게도, 회사에서 팀원들에게도 언제나 넓은 마음으로 품어줄 수 있는 사람. 그러나, 마흔이 된 나는 여전히 작은 것에도 흔들리고, 속이 상하고, 화가 나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그렇게 마흔이란 숫자에 기준을 세우고 스스로 버겁게 만들고 있는 것이 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걸 가볍게 만들 수 있는 것도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해와 같은 아량을 장착하지 못하면 좀 어때.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면 좀 어때. 이전까지 잘할 수 없었던 일들을 이젠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게 된 것도 많은데. 갈치조림을 더 이상 계량하지 않고도 눈대중으로 맛있게 만들 수 있고, 중요한 회의라고 대본을 만들어 두지 않아도 떨지 않고 발표할 수도 있어. 맛있는 음식마다 그에 잘 맞는 와인을 고를 수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남편의 작은 습관도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 있어. 시간이 주는 선물이 주름만은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서른의 시작도 기대보다는 불안이었다. 시끌벅적한 친구들과의 시간, 달콤한 연애.. 즉흥적으로 했던 많은 일들이 젊음으로 허락되던 이십 대를 보내며 이제 재밌는 일은 다 끝났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책임감으로 살아야 할 것 같은 30대가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삼십 대에 딸을 낳으면서 주는 사랑이 훨씬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며 사람들과 나누는 좋은 기운과 성취, 그로 인한 기쁨도 알게 되었다. 짜릿하지만 불안한 연애보다 결혼생활의 느긋한 안정이 주는 따뜻함, 뒤늦게 다시 시작한 공부에서 얻는 즐거움.. 수많은 다채로운 감정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지금 시작하는 사십 대가 설렌다. 살려고 시작한 운동 덕에 매일 아침 인바디 체중계로 조금씩이나마 늘어나는 근육량 체크하는 재미가 쏠쏠하고, 주말에도 엄마를 찾기보다는   일이 많아진 딸아이 덕분에 다시  읽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이렇게 삼십 대에는 모르던 감정과 경험들을 만날 생각에 나는 나의 사십대가 기대된다. 그게  즐겁고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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