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서 눈뜬 새로운 세상
부풀었던 기대가 무색할 만큼 막상 갔을 때 별다른 여운을 주지 못하는 여행지가 있는가 하면 가기 전까지는 별 감흥 없이 느껴졌었는데, 다녀와서는 자꾸만 한 번씩 생각나고 꼭 언젠가 다시 가게 되기를 그리게 되는 곳도 있다. 다녀온 후, 미지의 장소가 주는 설렘을 걷어내고 나서도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도시. 내 마음속에도 그런 곳이 있다.
몇 년 전 학회 참석으로 회사에서 가게 된 출장지, 바르셀로나. 출장으로 처음 스페인에 가게 된 내게 그 이전까지 바르셀로나는 그런 곳이었다. 아주 어릴 때 올림픽 개최지로 처음 알게 된 도시. 친구들이 대학교 때 유럽 배낭여행 가면 꼭 들리던 곳, 그리고 결혼 후 남편과 로마여행을 갔을 때 투어가이드 분이 추천하는 유럽 여행지 1순위로 들었던 곳. 그때 그 투어가이드가 내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꼽았을 때도 나는 왜인진 모르지만 기대했던 답이 아니었던 것처럼 바람 빠진 목소리로 네에 하고 말았었다. 그렇게 특별한 기대도 아무 사전 지식도 없이 일주일간의 출장을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긴 비행과 수면부족으로 짙어진 눈 밑의 그늘과 푸석한 얼굴을 큰 선글라스로 가리고 먼저 와있던 다른 동료를 만났다. 그렇게 바르셀로네타 해변 근처 숙소에 짐을 풀고 걸어 나와 찾은 맛집에서 만난 요리는 이 도시에 대한 밍숭 했던 나의 마음을 순식간에 뜨겁게 바꿔주는데 충분했다. 해장에 딱일 것 같은 깊은 맛의 한국식 해물탕과 묘하게 겹치면서도 이국적인 감칠맛을 선사하는 국물이 많은 빠에야 요리에 시원한 청량감이 느껴지는 스페인 까바 한잔, 그리고 씨를 빼지 않은 살짝 단단한 식감의 올리브. 잠을 못 자 비몽사몽 입맛도 별로 없었는데,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나에게 문화충격 수준의 감정을 가져온 것은, 그렇게 맛의 신세계를 경험한 우리가 머무는 동안 일을 마치고 맛집을 찾을 때마다 만나게 되는, 2 유로면 듬뿍 담겨 나오는 올리브였다. 씨를 빼지 않은 적당히 잘 절여진 올리브는 아삭하고 탱글탱글 씹는 맛이 좋고, 새콤 과 단짠 그사이 어디쯤, 그렇게 행복해지는 맛이었다. 그동안 올리브를 콥 샐러드나 피자에 색깔 맞추기 위해 먹는 토핑 정도로만 알고 있던 나는 이렇게 맛도 좋은데 몸에도 좋다는 열매에게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올리브의 충격 이후로도 알던 음식의 새로운 발견은 계속되었다. 잘 구운 바게트에 신선한 마늘과 생토마토를 문지르다 올리브 오일과 소금 한 꼬집이면 완성되는 판콘 토마테. 우리 집에 늘 굴러다니는 아이들로 그것도 간단하게 이런 맛을 낼 수 있었다니. 왠지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활기가 넘치던 보케리아 시장에서 뺨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호로록 한 입에 넘긴 짜릿하고 싱싱한 굴은 또 어떤가. 낮동안에는 일정 때문에 멋들어진 관광지는 꿈에도 못 꾸었지만, 저녁이 되면 핑크빛 노을이 보이는 야외 테라스에서 누릴 수 있는 달콤한 날씨와 신선한 요리 그리고 소소한 이야기만으로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느꼈다. 스페인 사람들 먹을 줄 아네 하면서. 음식도 이럴진대 구엘공원은 또 얼마나 멋지겠냐면서.
많은 사람들이 바르셀로나에 가면 응당 모두 가본다는 곳에 다 가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촘촘한 출장 일정 속 아주 잠깐씩만 허락되었던 새로운 미식의 세계와 마음을 흔드는 느긋한 분위기의 여운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바르셀로나는 수많은 도시를 제치고, 코로나가 끝나면 꼭 다시 가고픈 나의 최애 도시가 되었다. 사람이든 도시든 이래서 밀당이 중요한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오늘도 올리브 오일을 듬뿍 뿌린 초록 샐러드에 씨가 있는 올리브를 반찬 삼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