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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하 Oct 26. 2022

불효자식

나는 아픈 자식이다.

나는 원래 효녀였다.

33살 평생 동안 부모님 속을 썩인 적을 생각해보라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주변에서도 ‘효녀’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고 그 흔한 사춘기도 모르게 지나간 나의 세월은 일탈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큰소리 내며 싸워본 적도 없고 부모님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아무리 늦어도 밤 11시면 꼬박꼬박 집에 들어왔다. 외박은 종종 했어도 언제나 사전 통보를 하고 누구와 어딜 가는지 물어보기 전에 공유했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혼자 독립해본 적도 없고 결혼도 안 했으니 이 나이 먹도록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나는 ‘캥거루족’의 표본이었다. 집주인인 부모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30대가 되어서도 부모님과 말다툼 한번 하지 않던 나는 그런 딸이었다.


불효의 시작.

그랬던 내가 의도치 않게 불효녀가 되었다. 나의 병, 혈액암 4기. 이 진단을 받은 나는 어느새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은 불효를 저질렀다. 내가 의도한 것은 단 하나도 없는데 억울하게도 나의 병은 나뿐만 아니라 나의 부모님의 삶까지 바꿔놓았다. 병원 다인실에 입원을 해있는 와중에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들은 보호자가 배우자이거나 자식인 반면에 우리 엄마만 부모였다. 그걸 인지하게 되자 남들은 이 나이에 결혼해서 손주라도 안겨줄 텐데 병실에 꼼짝없이 누워서 엄마가 떠주는 밥을 먹고 있는 내가 등신 같았다. 그때 알았다. 가장 큰 불효는 부모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 그다음으로 아픈 것.


나의 엄마.

처음 병을 진단받았을 때도 내가 암환자라는 사실보다 ‘이 사실을 과연 엄마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가 가장 걱정되었다. 나의 엄마는 키 150 초반의 너무나도 작고 눈물도 많은 약한 사람이다. 작은 일에도 스트레스를 잔뜩 받는 예민한 엄마를 생각하니 병에 걸린 건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자신보다도 엄마가 걱정되었다. 그런 엄마의 성향을 너무나도 잘 아는 이모들과 사촌들 또한 나보다도 엄마를 걱정했다. 우리 엄마는 겁이 많아서 그 흔한 귀를 뚫어본 적도 없고 살면서 욕 한번 해본 적이 없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하지 못하고 늘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우리 엄마. 택시를 타도 차가 많이 막히면 어차피 미터기 금액이 올라가는데도 기사님께 사과하고, 식당에서도 바쁜 직원들 불편할까 봐 “여기 반찬 좀 더 주세요” 조차 단 한 번을 안 하는 그런 사람이 나의 엄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연기한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결국 내 병을 말해야 했다. 떨어지지 않던 입을 겨우 열고 내 병을 전했을 때 나는 엄마가 괜찮은 줄 알았다. “그깟 거 치료하면 돼!”라고 눈물 한 방울 없이 단호하게 말하는 엄마를 보며 알고 보면 우리 엄마는 강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만큼은 마음 놓고 엄마 품에 안겨서 펑펑 울었었다. 지금은 이날 엄마에게 안겨 목놓아 울었던 게 가장 후회된다. 자식을 낳아본 적이 없는 나는 흔히들 ‘엄마는 강하다’라고 하니까 의외로 큰일이 닥치니 ‘우리 엄마도 강해지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엄마는 내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모의 통화를 엿듣게 되었는데 그 통화내용이 꽤 충격이었다. 내가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입원을 하던 중에 엄마는 혼자 정신과에 가서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내 입원기간에 매일 이모에게 전화해서 울었다고 한다. 무심했던 나는 엄마가 아점저로 먹기 시작한 그 약이 그저 원래 복용하던 콜레스테롤 약이 늘어난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약에 의존하지 않고는 자식이 아픈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나 몰래 집 앞 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은 것이었다. 약이 없이는 밤에 잠들지 못할 정도로 나의 병은 엄마의 매일을 괴롭혔다.


그럼에도 엄마는 내가 병을 진단받아서부터 항암치료를 3차까지 진행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울지 않았다. 이제는 그 마음을 알기에 나도 이를 악물고 엄마 앞에서 절대 울지 않는다. 지금도 나의 마음은 몇 번씩이고 무너지고 불안감은 시시때때로 날 괴롭히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효도는 그저 씩씩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견딜만한 척뿐이다. ‘이 정도는 견딜만해’는 어느새 습관처럼 입에 붙었고 다음날 아침에 눈이 부으면 그조차도 티가날까 잠들기 전 차오르는 눈물도 삼켜낸다. 젊은 암환자와 엄마는 그렇게 매일을 서로에게 연기하고 있다.


나의 아빠.

약한 엄마와는 정반대로 나의 아빠는 정말 강한 사람이다.   번도 우는   적이 없고  한번  하는 엄마와는 다르게 매일 거친 말을 내뿜는 사람이다. 가족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어서 나는 자랄    번도 아빠에게 혼나  적이 없지만 그런 사람이 밖에 나가면 180 달라진다. 불의를 보면 60 넘은  나이에도  참고 겁도 없이 싸움을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상대적으로 아빠는 많이 걱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강하다고 생각했던 우리 아빠는 어느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내가 부모에 누나도 그랬는데 자식까지 그럴 일은 없지라고 말했었다. 아빠가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 그때 알았다. 부정적인 우리 아빠는 나름대로 최선의 긍정 회로를 돌리고 있던 것이었다.


사실 아빠는 정말 어려운 형편에서 자랐다. 나의 할아버지는 80이 한참 넘은 지금까지도 글을 모르고 그렇기에 평생을 노동일을 하여서 가족을 부양하였다. 나의 할머니는 젊어서부터 20년의 세월을 아파서 병원에서 매번 고비라고 했음에도 그 시간들을 견뎌내시다 60을 조금 넘기고 돌아가셨다. 아빠는 그런 할머니를 늘 지켜보며 자라느라 대학병원이라면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나의 고모 또한 젊어서부터 마음의 병이 너무도 극심하여 꽤나 극단적인 상황이 종종 벌어졌고 아빠의 젊은 시절에는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고 한다. 2019년, 할아버지가 허리 수술을 했을 때도 아빠는 강철체력으로 두 달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병원에서 먹고 자며 간병을 했고 퇴원을 하자 그 뒤로 지금까지 단 한주도 빠짐없이 주말마다 가서 할아버지를 챙기고 있다.


아빠의 ‘자식까지 그럴 순 없지’라는 말은 더 이상 본인 삶에 가족이 아플 일은 없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염원이 무색하게도 나는 암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결과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내 소식을 들은 아빠는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가 항암치료를 시작하는 날부터 빠짐없이 매주 나를 직접 운전해서 병원에 데리고 다닌다. 나는 통원 항암을 하기 때문에 오전 7시 전에 집을 나서서 오후 4시가 넘어야 끝나는데도 그 오랜 시간을 차나 병원 소파에서 날 기다린다. 나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이 매일 타는 택시에 균이라도 있을까 봐 평일에 일을 빠져가면서까지 나를 병원에 태워 다니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매번 병원에 갈 때마다 ‘오늘 피검사 주사는 하나도 안 아프네’라고 거짓말을 한다.


최고의 효도, 완치를 향해서.

내일 아침 눈이 부은 나를 보고 엄마가 물어본다면 나는 간밤에 슬픈 영화를 봤다고 거짓말을 할 것이다. 치료를 잘 견디는 것, 그리고 거짓말. 그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효도다. 그리고 역시나 아픈 자식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효도는 완치. 이만큼 속을 썩였으면 되었다. 치료가 끝나고 완치 판정을 받기까지 5년이 걸린다는 걸 알지만 버티고 완치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효도를 할 수 있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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