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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Feb 10. 2024

나를, 그런 식으로, 보내지 마

반려동물 복제 이슈를 바라보며

영화 <아일랜드>는 장기적출과 대리모 용도로 생산한 복제인간에 대한 SF영화다. 복제인간의 생명윤리라는 주제이지만 킬링타임 액션을 적당히 섞은 오락영화에 가까운데, 복제인간의 윤리성을 소재로 활용하는 것은 SF영화나 소설에서 흔한 일이 되었다.

이 소재를 다룬 훨씬 묵직하고 진지한 장편소설로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가 있다.


영국의 기숙사 학교에서 '사육'된 소설 속 복제인간들은 졸업 후엔 결국 '원본'을 위해 장기를 하나둘씩 적출당하다 죽게 되는 운명이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행복한 추억과 친구들을 가졌던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다녔던 학교에 어떤 비밀이 있었는지를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얼핏 복고풍 학원물 같은 분위기의 이 작품은, 중간중간 갸우뚱하게 하는 단어들이 등장하다가 중후반부를 지나며 비로소 뒤통수를 맞은 듯 아찔해지고, 숙연해지게 만든다.

담담한 문체에 젖어들다 책을 덮고 나면 깊고 먹먹한 슬픔이 밀려든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복제인간들의 이야기는 많은 것들을 떠오르게 한다.    


"바로 이 순간에도 전국 각지에서는 수많은 학생들이 통탄할 만한 상황에서 사육되고 있단다."

...

"그 무렵이 되자 그들은 너희가 어떻게 사육되는지, 너희 같은 존재가 꼭 있었어야 했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무렵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어. 그 과정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단다."


그저 소설 속 이야기라고만 할 수 있을까. 복제인간이 아니더라도 전국의 공장식 펫숍들에서 수십 년간,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비단 펫숍만의 문제일까. 특정 종의 '애완'동물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생명이 소모되는 일은 이미 수백 년 동안 공공연히 있어왔다. 유전병과 질병에 시달리는 순종들을 인간은 귀여워하며 소비하다 버리고 또 만들고 한다.

공장식 축산업과 실험동물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동물들에만 해당되는 문제일까. 궁극적으로 동물복지와 인간복지는 별개의 영역이 아니다.  


"마치 왔다가 가 버리는 유행과도 같군요. 우리에겐 단 한 번밖에 없는 삶인데 말이에요."


소설 속 주인공의 말처럼, '단 한 번밖에 없는 삶'들이 지금도 너무나 쉽게 소모되고, 소비되고, 버려지고, 고통받고, 학살당한다. 이 지구상에서 매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





영국드라마 <블랙미러> 시즌2의 'Be right back (돌아올게)'라는 에피소드에는 복제인간은 아니지만 죽은 자의 생전의 SNS 데이터를 바탕으로 AI로 구현한, 죽은 이와 똑같은 형상의 인형 혹은 안드로이드가 나온다.

사고로 갑자기 사망한 남편을 그리워하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아내가 드라마 속 가상의 기술로 남편을 복제한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 똑같이 생기고 똑같이 말하는 복제품으로 인해 처음에는 그리움의 감정이 해소되는 것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그러다 결국엔 '불쾌한 골짜기' 비슷한 감정들을 느끼고 깨달으며 복제품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그냥 잔물결일 뿐이야. 너한테는 과거가 없어."


사랑하는 이를 잃고 마땅히 거쳐야 할 고통의 시간을 없애고 복제품으로 욕구 해소를 한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들었다. 그건 바로 떠난 이에 대한 애도이다.

애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떠난 이에 대한 모욕이자, 가장 끔찍한 형태의 이별이다.

떠난 이의 입장이라면 자신이 그런 식으로 잊히고 대체된다는 것이 너무나 슬펐을 것이다.


<나를 보내지 마>의 주인공의 말처럼, 내 곁을 떠난 소중했던 존재는 되살려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어야 한다. 그것이 존재에 대한 마지막 예의이자, 사랑이다.


"내가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기억은 결코 퇴색하지 않는다. 나는 루스를 잃었고 토미를 잃었지만 그들에 대한 나의 기억만큼은 잃지 않았다."




죽은 반려동물이 다시 보고 싶다는 이유로 반려동물을 복제하는 일이 이미 일어났다고 한다. 찬반양론 따위 나는 관심이 없다.

한 마리를 복제하기 위해 여러 생명들이 고통받고 희생되고 '소모'되는 일이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는데(난자공여견, 대리모견), 어떻게 토론의 여지라는 게 있을 수 있나.


인간은 어디까지 끔찍해지고, 사악해질 수 있는가. 인간에게 그 한계란 없다.

호전적이고 파괴적인 본성을 지닌 호모사피엔스 종족이 기술을 만났을 때, 영화나 소설로 상상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 결국 실현되지 않는 것은 없다. 인류 역사에서 기술폭발이 일어난 후 그 가속도를 줄이거나 이전으로 되돌릴 방법은 절멸 외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발 디디는 곳마다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인간 종족의 파괴력과 그 가속도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반려동물은 물론이고, 죽은 자식을 다시 보기 위해 복제를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근거가 어디에 있을까.  

디스토피아는 현재진행 중이다.


<나를 보내지 마>의 주인공의 입을 빌려, 그저 말해본다.

"이건 수치스러운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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