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민감자가 접하는 동물학대 뉴스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은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제목 중 하나다. 버지니아 울프가 요절한 작가 캐서린 맨스필드의 글을 읽고 나서 쓴 글이다.
오래전 읽었던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들은 사실 '자기만의 방'을 제외하고는 기억이 거의 나질 않는다.
지금과 다른 삶을 살던 시절, 소위 중증 '예술가병'에 걸린 이십 대의 문학도였던 나에게 버지니아 울프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고 그 책을 옆에 둔 채 향유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정신적 액세서리 같은 거였는지도 모른다. (구찌보다 버지니아울프)
문학과 멀어진 지금도 이 전설적인 작가의 이름은 이제 기억도 안 나는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곤 하는데, 책장 한구석에 오랫동안 꽂혀 있었던 책인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A terribly sensitive mind)'은, 그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제목만큼은 어떤 고전적인 명품 브랜드명 마냥 여태 기억을 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심리학 전공자가 되고 나서 소환된 단어는 그중에서도 '민감한(sensitive)'인데, 나 자신이 소위 HSP(highly sensitive person)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다시 한번 저 에세이 제목이 굵은 글씨로 떠올랐더랬다.
HSP(초민감자)에 대한 개념은 민감성에 대해 연구한 심리상담가 일레인 아론의 책 <The Highly Sensitive Person>[역서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과 일자 샌드의 책 <Highly Sensitive People in an Insensitive World>[역서 '센서티브']으로 널리 알려졌다. 개인적으로는 네이버 블로그 ‘무명자의 심리학 광장’을 운영하는 무명자 님의 블로그 글과 책(<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 최재훈 저, 2024 출간)에서 공감 가는 내용을 많이 접하기도 했다.
비교적 최근에 연구되고 있는 개념이기는 하지만 HSP는 여러 가지 심리학 개념이나 심리검사 중에서 나라는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하는 설명틀로 와닿았다.
정서적 공감이 순식간에 되어버리고, 온갖 오감 자극에 예민하고, 예술적이고 심미적인 것에 과하게 심취하고, 의도하지 않아도 타인의 입장이나 미묘한 분위기가 알아차려지는 바람에 정작 나 자신은 속내를 내비치지 않으려 하고, 사람들이 조금만 많거나 사람을 접하는 시간이 조금만 길어져도 쉽사리 기 빨리고, 그래서 심리적 소진감을 자주 경험하고 등등.
문서의 사소한 오탈자부터 지나가는 사람의 향수냄새나 소음의 데시벨과 높낮이, 타인의 말투에 이르기까지, 내 민감성의 영역은 너무나 광범위해서, 남들이 다 이런 게 아니라는 사실이 오히려 놀라울 지경이었다. 당연히 HSP의 체크리스트에도 거의 100퍼센트 해당이 되는데, 그래서 내가 평생 힘들었구나, 그래서 내가 끊임없이 속이 시끄럽고 피곤하구나 하는 게 구슬 꿰어지듯 꿰어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이 심리상담사로 산다는 건 강점이자 저주라는 것을, 지난 수년의 상담사 생활로 알아졌다. 나는 이 일을 어느 정도 해낼 수는 있지만, 동시에 이 일을 끔찍하게 힘들어한다.
타인의 고통을 곧바로 내 것으로 느끼는 것은 직업소진감을 넘어서는 고통이다.
그러나 가장 끔찍한 부분은 일에 대한 투정 따위가 아니다.
끔찍하고 잔인하며 폭력적인 상황을 목격하는 일은 그것이 간접경험이라 할지라도 누구에게나 간접외상을 유발하는데, 내게 가장 큰 심리적 외상으로 작용하는 1순위는 동물학대 관련 정보와 소식들이다.
동물이 아닌 다른 폭력적 사건사고나 정보들이 더 괜찮아서가 아니라, 유독 동물과 관련된 사건사고와 소식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접하는 순간 즉각 신체반응이 나타날 정도로 민감성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저미고, 손발은 차가워지며, 교감신경은 투쟁도피반응을 나타낸다.
가깝게는 축산업부터, 더욱 빈번해지는 학대와 유기 이슈, 학대 가해자에게 법적 처벌이 거의 내려지지 않는 현실, 동물원 이슈, 환경 문제로 인해 동물들이 겪는 일들 등등. 모든 장면의 잔상들이 뇌리에 박혀, 온 세상 그 모든 찰나가 내겐 지옥 한가운데다.
소식들을 접하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들 동안에도, HSP에게 동물과 약자에 대한 잔인한 소식들은 그저 몇 개의 문장과 사진 한 장면으로도 피해 동물의 고통을 간접체험하게 하는 재앙이다.
누군가가 물었다. 그렇게 괴로우면 안 보면 되지 않냐고.
맞다. 괴로운 정보를 덜 접하면 되는 일이다. SNS 어플을 없애고 동물 관련 기관의 계정들도 언팔로우하면 그만이다.
조금만 조작하면 내 개인 SNS의 알고리즘은 금세 이 세상을 전혀 딴 세상으로 묘사해 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괴롭히듯이 매일 동물에 대한 소식들을 직시하는 이유는,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더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실험실 동물이든 전쟁터의 어린 아이이든 세상의 연약한 존재들을 모두 구원할 수 없다는 무력감보다, 진실을 모르고 사는 무지함이 더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적다는 무력감을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로 느끼며 깊은 죄책감과 연민을 안고 사는 것.
이 민감한 마음이 무뎌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