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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Sep 08. 2022

슬픈 글을 쓰면 살아갈 수 있다

기록하는 자입니다 오직 기록의 방식으로 지워가는 자입니다

“철학으로 밥 벌어먹고 살고 싶으면 그리스나 가. 그것도 고대 그리스로.”


짚신 한 짝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철학이다. 우주의 본질, 인식의 방법 등을 연구한다. 그래, 흥미롭긴 한데, 이게 무슨 쓸모가 있는 거지? 현실에 적용시키기 어려운 것, 허황된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 배부른 사람들이 시간이 남아돌아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철학의 사전적 정의는 굳이 열거하지 않겠다. 대신 내 생각을 소개하고자 한다.

앞서 말한 것과 달리 철학은 어떤 학문보다 현실과 맞닿아 있다. 심리학보다 치유의 효과가 강한 학문이다. 나의 존재와 타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게 한다. 보다 본질적으로, 왜 자살하지 않는가, 죽지 않고 살고 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한다.

철학을 공부하며 나는 나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내’가 없다면 사회도 없고, 세계도 존재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먹은 것을 토해내고 유리병을 깨뜨려 살갗을 그어버리던 어린 시절, 그 누구도 날 돕지 못했다. 전보다 건강해 보인다는 말은 더 뚱뚱해졌다고 비꼬는 것 같았고, 큰일 날까 봐 걱정된다는 말은 부담스러웠다. 부끄러웠고, 숨기고 싶었고, 사라지고 싶었다. 손길을 뻗어주는 사람은 많았지만 스스로 내칠 뿐이었다. 유일하게 내가 잡았던 것은 친구가 선물해 준 일기장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모든 것을 드러냈다. 직설적으로 내 감정을 표현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것들을 털어놓았다. 그곳에선 죽고 싶다는 말도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치환됐다. 전보다 객관적으로 내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스무 살 이후 우울증이라는 검은 개에 물려 뜯길 때도 피를 닦아주고 붕대를 감아준 것은 내 글이었다.


글은 나를 멋대로 판단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었다. 글은 잠도 자지 않고 밤새 나를 간호했다. 글을 쓸수록 죽고 싶었고, 죽고 싶은 만큼 살고 싶었고, 살고 싶은 만큼 사랑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글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슬픈 책을 읽고 슬픈 일을 꺼내 슬픈 글로 쓰면 슬픈 채로 산다. 살아갈 수 있다. 슬픈 사람은 할 말이 많기 마련이며, 거기서부터 글쓰기는 시작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은유, <쓰기의 말들> 중)




글이 나를 살린 것처럼 이제는 내 글로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싶다. 글을 직접 쓰기도 했지만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글도 많이 읽었다. 눈물을 뚝뚝 흘려 책이 우그러진 만큼 나는 허리를 필 수 있었다. 눈물자국을 발판 삼아 일어섰다.

그렇기에 뻔하고 단편적인 위로가 아닌, 나의 경험과 마음을 나누는 글을 쓰고 싶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피상적인 위로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끙끙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성취해내지 않아도,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꽃이 피는 계절은 모두 다르니 계속 살아달라고 전하고 싶다. 글의 힘을 믿는다.


신철규 시인은 절벽 끝에 있는 사람을 잠깐 돌아보게 하는 것, 다만 반걸음이라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이 시라 하였다. 나의 글을 통해 한 명이라도 뒤로 물러서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람을 살리는 글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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