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식을 만난 후 감방으로 돌아온 기남은 참았던 눈물을 토하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민식이한테 윤식이를 돌보며 살게 했던 게 맞는 걸까?
어린것들 둘이 잘 해낼 수 있을까?’
기남은 흔들렸다.
하지만 곧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난 혼자였지만 걔들은 둘이다.
그리고 민식이는 날 닮아 머린 좋고 내가 허물어진 부분, 자제력이 많이 뛰어난 아이다.
내 아들들은 둘이 서로 마음을 합쳐 앞날을 잘 헤쳐 나갈 거다!’
기남의 눈에서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고, 그러다 지쳐 그는 절로 잠에 빠져들었다.
잠시 후 눈을 뜬 기남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기남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평범한 용모와 복장에,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건조한 표정과 눈빛을 가진 그가 기남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과 거래 하나를 하러 왔소.”
“!!! 누구시죠? 여긴 어떻게... 그런데 거래라뇨?”
기남은 어리둥절했다.
“당신은 모레, 그러니까 올해 마지막을 하루 앞둔 12월 30일 사형당할 예정이지. 22명과 함께.”
“...”
“거래를 받아들일지 아닐지 먼저 대답부터 하시오.”
“무슨 거래”
그가 말을 잘랐다.
“뭐가 됐든 받아들일지 아닐지 그것부터 대답하란 말이오.”
그가 어떻게 이 안에 들어왔는지 그것도 의아했지만 일단 그의 어투가 맘에 안 들어 기남은 심통 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거래란 게 뭔지 알아야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할 거 아니요. 안 그렇소?”
“어차피 낼모레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사람이 할 말은 아닐 듯싶은데.”
“... 그런데 이제 곧 죽을 내게 왜, 어떤 거래를 제안하는 거요? 무슨 이유로?”
“억울한 사람에게 주는 기회 같은 거라 생각하시오.”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잠시 기남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곧 결심을 굳힌 듯 다부지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들어보고 정하겠소. 혹시 내 아이들에게 해가 되는 거라면...”
기남을 지긋이 바라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주사위가 있소. 거래할 생각이 있으면 일단 이걸 던져 숫자부터 확인하시오.”
“숫자를 확인하고 그 담은”
그가 역시 건조하게 말을 잘랐다.
“주사위를 던지고 나면 말해주겠소. 어서 주사위부터 던지시오.”
“주사위를 던져 숫자가 나오고, 그러고 나면 어떻게 되는 건지부터 말해주시죠?”
기남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그가 기남을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이 주사위는 보통 주사위와 다르게 숫자가 0부터 5까지, 그리고 숫자 위에 +가 있는 게 있소. 그러니까 12면체로 되어 있는 셈이지.
그중 던져 나오는 숫자대로 당신은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소.
숫자에 +가 있으면 당신에겐 특별한 능력도 그 숫자만큼 함께 부여되오.
그리고 돌아갈 장소와 때는 당신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소.
하지만 만약 0이 나오면 당신에게 되돌아갈 기회는 없는 셈이요. 복불복인 셈이지!
자 이제 주사위를 던지시오.”
사나이를 바라보던 기남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풉! 그러니까 지금 사형선고받은 나를 데리고 장난치러 여기까지 찾아온 겁니까?”
“...”
“과거로 되돌아간다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흣! 게다가 특별한 능력?”
그가 이번엔 단호한 목소리로 낮게 외쳤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뭐랄까? 일반적인, 그런 사람이 아니오.”
“아! 그럼 귀신?! 네네! 귀신도 좋고 미리 온 저승사자도 좋은데 난 이미 너무 피곤하니 그만 돌아가시죠!”
“잘 들으시오. 난 당신이 성은주를 죽이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소. 그건 실수였지.
그리고 왜 살인죄를 덮어쓰려고 하는지도 다 알고 있소.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까지 모두.”
기남이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 외쳤다.
“그걸 어떻게. 아니 당신 도대체 누구요? 어떻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다시 그가 말을 잘랐다.
“이제 됐소? 내가 누군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오.
아까도 말했듯 억울한 당신을 위해 기회를 주는 거라 여기고 주사위나 어서 던지시오!”
기남이 망설이던 끝에 결심한 듯 주사위를 받아 들고 숨을 골랐다.
꿈이든 생시든 뭐가 됐든 그가 말한 대로 이제 곧 죽을 자신이 뭘 못할까 싶어서였다.
그때 사나이 입에서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아, 한 가지 잊은 게 있소. 이건 거래라고 한 말 기억하고 있소?”
“아, 그렇군요. 거래란 주고받는 거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단 뜻이겠군!”
기남이 비아냥거리듯 외쳤다.
“그렇소. 당신은 과거로 돌아갈 때마다 사람 목숨을 살려내야 하오.
첫 번째에선 한 사람, 그리고 두 번째에선 두 사람, 이런 식으로.
물론 다다익선이긴 하오만.”
“뭐요? 사람 목숨을 살려야 한다고요? 그건 또 무슨, 그리고 내가 어떻게”
“그건 당신이 고민할 문제요. 자, 그만 주사위나 던지시오!”
“... 혹시 내가 사람 목숨을 구하지 못하면요? 그러면 어찌 되는 거죠?”
“당연히 그럴 경우엔 다음 회귀가 불가능하지 않겠소?”
다시 한번 기남은 숨을 고르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갖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운명처럼 좌절을 경험했었다.
그랬던 내 인생, 여기에서 더 나빠질 게 뭐가 있을까? 밑져야 본전밖에 더 될까?
그래! 한번 해 보는 거다!
뭐가 됐든 새로운 기회를 부여잡고 새롭게 태어나 새롭게 살아볼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 보는 거다!
아니, 꿈이라도 좋다! 그냥 해 보자!
기남은 드디어 결심하고 마른침을 삼킨 후 결연하게 외쳤다.
“하겠소!”
그리고 기남은 높이 주사위를 던졌다.
주사위가 허공으로 잠시 떠올랐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드디어 12면체의 주사위 한 면이 도드라지게 그들 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가 주사위를 집으며 나지막이 외쳤다.
“4+군!”
그의 입에서 건조한 한마디가 터져 나왔고, 기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숫자를 한참 바라봤다.
“이것으로 당신은 4번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고, 4가지 능력도 함께 갖게 됐소.”
“과거로 4번이나 되돌아갈 수 있다고요? 그리고 4가지 능력이요? 그런데 능력이라면...”
“그건 지금 말해줄 수 없소. 일단 먼저 과거로 돌아가면 당신에게 능력을 쓸 기회가 주어질 거요.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자면 4가지 능력을 한 번에 다 쓸 수도 있고, 나눠서 쓸 수도 있는데 그건 당신이 결정할 문제요.
또 하나, 당신은 과거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당신의 아이들 앞에 나타나선 안 되오.”
“그 얘긴 과거로 되돌아가더라도 내 아이들을 다신 볼 수 없단 뜻인가요?”
올라오는 마른기침을 억지로 삼키며 기남이 외쳤다.
“아니, 그건 아니오. 마지막엔 볼 수 있소. 당신 같은 경운 4번째가 되겠군.
아, 그리고 말해둬야 할 게 하나 더 있소.
이걸 항상 몸에 간직하고 있다가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을 때 오른손에 꽉 쥐고 숨을 10초간 멈추시오.”
그는 기남 앞으로 주사위를 내밀었다.
기남은 그걸 받으며 긴장한 듯 두 눈을 꼭 감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기남은 사나이가 사라진 걸 발견했다.
사방을 둘러보던 기남은 잠시 후 그 사나이가 한 말 중 하나를 기억해 냈다.
그는 분명 이 거래가 억울한 사람에게 주는 기회라고 했다.
사실 기남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죄를 뒤집어쓴 게 맞았다.
말싸움 도중 은주가 칼을 가져와서 자해하려는 걸 막기 위해 엎치락뒤치락하다 실수로 그녀 스스로 자신을 찌르게 됐고, 순간 두려움에 휩싸인 기남은 즉시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다.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그들은 소년원 출신인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게 거의 확실했기에 그는 어차피 망가진 인생 차라리 죄를 뒤집어쓰기로 맘먹었다.
‘이게 맞아! 애들한테 평생 옥살이 뒷바라지를 하게 하느니 차라리 애들 앞에서 완전히 사라져 주는 게 마지막으로 내 새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야!’
그런 이유로 그는 자수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시체를 유기했고 잡히길 기다렸다.
그리고 결국 그는 붙잡혔고, 살인죄, 시체 유기죄를 순순히 인정했다.
자신이 체포되면 아이들 역시 자기가 걸었던 길, 즉 고아원으로 가야 할 수밖에 없단 걸 잘 알고 있었지만 혼자가 아닌 둘이니까 잘 헤쳐 나갈 거라고 믿었다.
더불어 영민한 민식이 동생을 잘 보살필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도 형무소에서 면회 온 민식이를 만났을 때 기남은 순간적으로 잠시 갈등했었다.
‘살인범이 아니라고 고백해야 하나? 아니지! 그냥 입 다무는 게 맞지!’
자기가 진실을 고백한다면 자신을 고발한 민식이 평생 회한 속에서 살아갈 게 자명해 그는 결국 입을 다무는 걸로 마음을 정했다.
살인자가 된 자길 원망하더라도 그게 나을 게 확실했다.
그렇게 그는 모든 진실을 끝까지 혼자 품었다.
드디어 1997년 12월 30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