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by 꿈꾸는 노마드

기남은 22명과 함께 사형장으로 향했고, 잠시 후 그들 모두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물론 그 전에 사형장으로 향하면서 기남은 모든 소지품을 남겨 놓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아들과의 추억 물품이라고 둘러대고 주사위를 챙겼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마지막 사형집행이 행해지게 되었는데, 기록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23명이 아닌 22명이 사형을 당했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기남 본인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기남은 처음에 자기가 기억하는 낯선 사내와의 일이 꿈이었었나 싶었다.

하지만 자기 손에 쥐어져 있는 주사위를 보면서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고, 동시에 담담해졌다.

그는 그 사내와 했던 모든 대화를 곱씹다가 자기가 미처 물어보지 못한 게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의연하게 사형집행에 임했다.

그리고 그가 말한 대로 오른손에 주사위를 쥔 채 10초간 숨을 멈췄다.


***


눈을 감고 있음에도 찬란한 햇살에 눈이 부셨다.

기남은 이제 눈을 뜨면 자기 눈앞에 어떤 모습이 펼쳐질까 자못 기대됐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혹시 무시무시한 지옥 한가운데 놓여있는 거 아닐까?’


햇살이 아니라 불구덩이가 반사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대했던 대로가 아니라면 어쩌지?’


걱정이 들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하지만 그 순간 반가운 목소리가 들리며 기남이 무사히 눈을 뜰 수 있게 만들었다.


“기남아! 일어나! 아침 먹고 학교 가야지!”


기남은 그 반가운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기 위해 눈을 크게 번쩍 떴다.

역시 그랬다.

자기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그 순간으로 자기는 돌아와 있었다.

기남은 자기 눈앞에 있는 반가운 얼굴을 향해 화락 달려들었다.


“어머, 얘가 오늘 왜 이래? 무슨 꿈이라도 꾼 거야?”


세상에 사랑하는 단 한 명인 인희가 어색하지만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기남은 그녀의 목에 팔을 두르고 한참 그대로 있었다.

그의 두 눈엔 환희의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어서 씻고 밥 먹고 학교 가야지! 나 곧 일하러 가야 해! 어서!”


서두르는 듯한 말투와는 다르게 기남의 팔은 그대로 둔 채 인희가 말을 이었다.

그제야 기남은 두른 팔을 풀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다 자기 얼굴을 꼬집어 보기도 하고 거울에 얼굴을 비추기도 했다.

거울엔 중학교 2학년 때 자기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뭔가 생각난 듯 기남이 슬그머니 눈물을 훔치며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며칠이죠? 아줌마 오늘 혹시 그 아저씨...”

“아저씨? 누구? 아, 내가 며칠 전에 말했던 그 사람?

그렇지 않아도 오늘 만나기로 했는데, 왜?”

“안 돼요! 절대 만나러 가면 안 돼요!”

“얘가 오늘 왜 이래? 너 정말 오늘 참 이상하다!”

“절대 그 사람 만나면 안 된다니까요! 제발 내 말 좀 들어줘요!”


낯선 표정을 이어가며 인희가 채근했다.


“왜 그러는 건데?”


기남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던 인희가 재촉했다.


“어서 씻고 아침 먹고 학교나 가! 어서!”


지지 않고 기남이 강경하게 외쳤다.


“안 돼요! 나 오늘 학교 안 갈 거예요. 그 사람 만나지 않는다는 약속하지 않으면.”

“어! 정말 이상하네. 평소랑 너 너무 달라 오늘!

왜 그러는 거야? 무슨 꿈을 꾼 거야? 아니면”

“네. 꿈에 그 아저씨 만나면 아줌마랑 나랑 정말 불행해진다고, 그러니까...

천사가 나타나서, 아니 아무튼 절대 안 돼요! 제발요!”

“너 정말...”

“나 제발 한 번만 믿어줘요! 지금까지 우리 둘이서도 잘 살았잖아요!

만나려면 그 사람 말고 다른 사람 만나요, 제발!”

“그래 알았어. 니가 정 그렇게 그 사람 싫다면 안 만날게. 이제 됐지? 빨랑 밥 먹고 학교 가!”

“정말이죠? 정말 안 만날 거죠? 약속해요!”


기남은 손가락을 내걸었고, 그걸 본 인희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마지못한 듯 손가락을 기남의 손가락에 걸고 약속했다.

기남은 훤한 미소를 지으며 만족한 듯 이불에서 뛰쳐나와 수돗가로 향했다.

그날 학교에 간 기남은 예전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을 만나 반가운 듯 한 명 한 명과 일일이 허그를 하고 등을 다독였다.

그런 그의 행동을 본 친구들은 놀라움으로 과한 말과 행동을 늘어놨다.


“얘 오늘 뭐 잘못 먹었냐? 왜 이러냐?”

“그러게. 새끼가 밤새 똥을 쳐 드셨나?”

“그게 아니라 연탄 가스 맡은 거 아냐?”

“맞아. 맛탱이 가면 안 하던 짓 한다고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그런 그들을 바라보면서 기남은 행복했다.

그들이 뭐라 하든 탓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인희와 저녁을 먹으며 기남은 인희에게 살갑게 굴었다.

기남이 자기 앞에 놓인 맛있는 반찬을 인희에게 집어주자, 그런 기남을 바라보던 인희가 놀란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너 정말 오늘 참 이상하네. 마치 어디 먼 데 갔다 온 사람같이 행동하고 있어.

왜 그러는 건데?”

“그럴 일이 좀 있어요. 말할 수도 없고 말해 봤자 이해하기도 힘든 일이에요. 흐흐.”

“그래? 암튼 난 너 이런 모습 보니까 너무 좋은데? 딸만 길러봐서 남자애 기르는 재미 잘 몰랐었는데 이제 좀 알 것도 같고. 흐.”

“네. 이제부터 맘껏 표현하고 맘껏 아줌마도 지켜드릴게요.”

“정말이지? 나 그럼 너만 믿고 살아도 되는 거지?”

“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우리 둘이 아주 행복하게 살자구요!”

“그래. 알았어. 이제 정말 아들로 믿고 살아야지!

와! 배도 안 아프고 아들 생기고 오늘 완전 운수 대통한 날이네!”

“저... 그럼, 이제부터 아줌마 대신 다르게 불러도 돼요?”

“다르게? 뭐? 엄마? 그래 주면 나야 좋지!

너처럼 공부 잘하고 착하고 잘생긴 아들 있으면 부러울 게 없지!”


인희가 환하게 웃으며 기대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네. 저도 아줌마, 아니 엄...마...한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도록 더 노력할게요.”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그 안에서 사랑과 기쁨을 읽었다.

인희도 인희지만, 기남은 이런 순간을 맞을 수 있다는 게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아 가슴이 마구 벅차올랐다.

하지만 밤이 되자 까닭을 알 수 없는 슬픔이 복받쳤다.

기남은 그 이유를 곧 알아챘다.

민식이와 윤식이가 맘에 걸린 거였다.


***


며칠 후 방학을 맞은 기남은 이제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골몰하기 시작했다.

방학을 이용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공부에 대한 계획, 거기에 자신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됐으니 적어도 한 명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그 사내와의 약속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일과 공부에 관해서는 별로 걱정이 안 됐지만,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문제에 대해선 고민이 시작됐다.

실질적으로 중학교 2학년 몸을 가진 자기가 어떻게 생명을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한 것부터 어떤 과정과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지 한편으론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접했던 과거 그 당시 큰 뉴스부터 찬찬히 떠올리기 시작했다.


‘1976년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 중 판문점에서 북한군들에 의해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났었지?’


워낙 중차대하고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대서특필됐던 사건이라 가장 이슈화된 사건임에는 분명하지만, 판문점과 군대에 얽힌 그 사건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기남은 곧 그 사건을 머리에서 지웠다.

그리고 자신이 느꼈던 큰 사건을 또 떠올리기 위해 기남은 다시 집중했다.

그러자 잠시 후 놀랍게도 당시 자기 가슴에 큰 파문을 던졌던 사건 하나가 기억나기 시작했다.


‘맞아! 그 사건이 있었지!’


그건 1977년 봄에 있었던, 자기처럼 어려운 처지였지만 성실하게 살던 한 남자가 무허가 움막 철거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이 안타까웠던 건 그가 살아온 이력이나 사정이 기남의 그것처럼 기구했다는 점도 그렇지만, 당시 잘못된 경찰 관계자들의 태도와 언론 보도로 그가 파렴치한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엔 제대로 된 사실을 알 수 없었고, 시간이 꽤 흐르고 그 사건의 진실이 파헤쳐지면서 그는 내막을 알게 됐다.

기남의 기억이 맞는다면 지금으로부터 약 8개월 후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로부터 약 3년 8개월 후 사형이 집행돼 형장의 이슬이 된다.

기남은 그의 죽음을 막아 그를 살리고, 그가 죽인 4명도 더불어 살려내야겠다 결심했다.

한 사건을 막으므로 무려 5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것에 그는 스스로 고무돼 가슴이 벅차올랐다.

해서 그는 방학 동안 엄마를 도와 일을 하고 용돈을 모아 먼저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굳세게 맘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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