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하고 며칠 후 기남은 인희에게 자신의 결심을 알렸다.
“엄마! 나 엄마 가게에서 엄마 도울래요.”
“그럴 필요 없다니까!”
“정 뭐 하시면 제가 도와드리는 대신 제게 용돈 주심 되잖아요? 많이는 말고요.”
“너 정말 용돈이 필요해서 그래?”
“그럼요.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에요? 크.”
“녀석! 그래, 알았어. 그럼 용돈 줄 테니까 나와서 도와 봐!
대신 맘에 안 들면 즉시 해고다! 알았지?”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간 기남의 도움을 말려왔던 인희도 결국 용돈 준다는 조건으로 그가 일 거드는 것을 허락했고, 그렇게 그는 자신의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기 시작했다.
기남은 인희가 허락한 그날 당장 힘찬 발걸음으로 인희의 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인희의 가게에 도착하기 전 근처에 있는 동수의 정육점을 먼저 기웃거렸다.
문 안쪽에서 동수가 열심히 고기를 다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남은 과거의 일들이 떠올라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인희의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남을 본 인희가 반가운 얼굴로 외쳤다.
“우리 아들! 드디어 엄마 도와주러 온 거야?”
“넵! 뭐부터 할까요, 엄...마...?”
“오호! 그래! 우선 저기 있는 기름통 여기로 좀 가져다줘. 사실 나 혼자 들긴 좀 무겁거든.”
“힘쓰는 건 이제부터 무조건 제가 합니다, 어..머..니!”
“어머니? 왜 어머니야? 엄마 아니고?”
“제 나이도 있는데 엄마보단 어머니가 더 낫지 않을까요?”
“아니! 난 엄마가 더 좋아! 어머닌 왠지 거리감 느껴져 싫어! 그냥 엄마라고 불러! 알았지?”
“원하신다면요! 엄.마!”
“흐흐. 그래. 얼마나 좋아. 엄마란 소리! 그래, 아들 이제부터 힘 좀 써줘!”
“물론 입죠, 엄마!”
둘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각자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둘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며 행복감에 젖어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게 느껴졌다.
***
용돈을 제법 모은 기남은 방학 끝 무렵 혼자 박흥식이 사는 곳으로 향했다.
첫 과업을 위해 가는 곳이기에 기남은 다소 흥분을 느꼈고 동시에 기대감에 휩싸였다.
얼마 후 기남은 드디어 그곳에 도착했다.
어느새 하늘이 어둑어둑 해져가고 있었다.
배도 고프고 지친 기남은 어찌할 바를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유영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작은 국밥집을 발견한 기남은 그곳으로 달렸다.
앉은 채 졸고 있던 할머니 한 분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눈을 뜨고 기남을 바라봤다.
“못 보던 얼굴이네?”
“저... 국밥 한 그릇 먹을 수 있을까요?”
“서울 말씨네! 서울에서 온 거여?”
“네. 국밥 하나만 말아주세요!”
“그려. 잠만 기둘려. 근데 학생이 쓰는 말투가 어째 그렇다냐? 흐흐.
그려! 내 후딱 말아줄게.”
할머니의 말에 기남은 잠시 움찔했다.
자기도 모르게 과거 어른이었을 당시 말투가 튀어나온 거였다.
할머니는 능숙한 솜씨로 후다닥 국밥을 말고 있었고, 그는 그녀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하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따끈한 국밥이 맛있어 보이는 깍두기 한 사발과 함께 그의 앞에 놓였다.
급하게 국밥을 먹기 시작하는 기남을 보면서 할머니가 앞자리에 앉았다.
“요상허네. 어째 서울 학상이 여 왔을가나? 뭔 일이래?”
“그게... 참, 할머니 혹시 요 위 천막촌에 사는 사람들 좀 아세요?”
국밥을 물 들이키듯 입 안으로 쓸어 넣으면서 기남이 물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손사래까지 쳐가면서 말했다.
“오매 그러다 체한다. 츤츤히 먹어! 오매 탈 나부리겠고만!”
“괜찮아요. 너무 배가 고파서요. 흐흐.”
“그려. 그라도 츤츤히 먹어. 글고 요 위 천막촌 사람들 내가 대충은 다 아는디 누굴 찾아?”
“네. 혹시 박흥식이라는 사람 아세요?”
“오, 흥식이! 알지! 아주 잘 알지!”
“정말요?”
반가운 듯 기남이 눈빛을 반짝이며 먹던 국밥을 멈추고 할머니를 쳐다봤다.
“근디 뭔 일이야? 갸 왜? 갸랑 뭔 일 있는겨?”
“그게... 직접 만나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려? 갸가 지 엄니랑 동상이랑 아주 어렵게 사는디! 영특한 아가였는디 세상이 참 그라쥐!”
“아 네... 어디 사는지도 아시나요, 할머니?”
“그라쥐! 내 잘 알지. 근디 지금 걸로 올라 가려는겨?”
“너무 늦긴 했는데 제가 여긴 첨이라 갈 데도 없고”
“그려? 그럼,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잘텨? 여기서 자고 낼 올라가면 되제!”
“아니 그래도 초면에 어떻게”
“그딴 소린 말고 그냥 여기서 자랑께. 어두워지는디 어디로 간다고 그려! 오늘 여기서 자고 낼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려줄텡께.”
“아 정말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그래도...”
“아, 고놈 참 말도 많네, 그려.”
할머니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네 놈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서 그려. 아주 묘한 눈빛이구먼.”
잠시 기남은 혹시나 할머니가 자신의 정체를 아는 게 아닐까 다시 한번 움찔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할머니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
낯선 곳에서 아침에 눈을 뜬 기남은 잠깐 아들 민식이와 윤식이 생각을 했다.
어젯밤 먹은 국밥을 상기하다 보니 국밥을 유독 좋아하던 애들 생각이 난 거였다.
그 사람 말에 의하면 마지막, 그러니까 4번째 회귀 후 아이들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지금까진 그 사람 말을 신뢰하지 못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그의 말을 믿어봄직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순간순간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남겨진 세 번의 회귀가 언제가 될지 그것도 알 수 없으니 더 답답했다.
씁쓸함을 느끼며 기남은 할머니를 찾아 방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그려! 잘 잤냐?”
“네. 덕분에 편하게 잘 잤습니다!”
“이리 와. 와서 아침밥부터 먹더라고.”
기남은 감사의 인사를 건넨 후 할머니가 준비해 놓은 국밥을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웬일인지 어제 아주 맛있게 먹었던 국밥이 오늘은 쓰게 느껴졌다.
아마도 아이들 생각 때문일 거라고 여긴 기남은 그래도 계속 국밥을 밀어 넣었다.
그런 기남의 행동을 주시하던 할머니가 한마디 했다.
“먹기 싫으면 굳이 안 먹어도 디아. 그러다 체할까 걱정스러웅께.
뭔가 맴 속에 맺힌 일이 있는 듯하고먼.”
먹던 걸 멈춘 기남이 할머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그런데 혹시 언제 시간 되세요? 박흥식씨 만나러”
“아야! 밥 다 먹고 나서 바로 가면 되재.”
“그럼, 지금 갈 수 있을까요? 저 그만 먹을게요, 죄송하지만 도저히”
“그려!”
할머니가 앞장섰고, 기남은 그녀를 따라 유영산으로 향했다.
산에 오르는 도중 이곳저곳에 천막이 쳐있는 걸 기남은 보게 됐다.
그중 한 천막 안에서 나는 소리가 밖에까지 또렷하게 들려왔다.
“오늘도 또 밀가루죽이야, 엄마?”
“...”
“아이 싫어! 나 이제 이거 더는 못 먹겠어! 차라리 산에 가서 내가 뭐 좀 캐 올게.”
“됐어! 내가 갈게.”
산에 처음 오르면서 천막이라도 한 가족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다면 그게 행복 아닐까 했었던 자기 생각이 짧았다는 걸 순간 기남은 깨달았다.
이 시대에 밥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라는 걸 잊고 있었던 자신이 새삼 부끄러웠다.
그때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다 왔구먼. 여기여.”
기남은 한 천막 앞에 서 있는 할머니 곁으로 가 그녀의 손에 지폐 한 장을 쥐어드렸다.
돈 액수를 확인한 할머니가 외쳤다.
“뭐시여! 뭘 이렇게 많이 줘! 국밥값이 얼마나 한다고!”
“그냥 받아두세요!”
“아니여! 이러면 안 되재!”
“아니에요. 제 마음은 더 드리고 싶어요.”
할머니가 기남을 바라보다 씩 웃으며 말했다.
“그려! 그럼 이따 흥식이랑 내려와 국밥 한 그릇 더 먹고 가! 아까 거의 먹지도 않았잖여! 응?”
“네! 그럴게요. 이따 봬요!”
할머니가 자리를 떴고, 기남은 크게 숨을 한 번 쉰 다음 천막 앞에 서 있었다.
그때 천막 안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자기보다 키가 훨씬 작은 20대 초반의 남자였다.
기남은 순간적으로 그가 박흥식이라는 걸 직감했다.
기남을 본 그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기남을 쳐다봤다.
기남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
“저... 혹시 박흥식씨세요?”
“...”
“전 남기남이라고 합니다!”
“...”
“운동 좋아하신다죠? 저도 그런데!”
“그 얘긴 어디서 들은 거지?”
“네. 아는 형님한테 들었어요.”
“아는 형님? 아는 형님이 누군데?”
“저... 사실 그 분 성함은 저도 몰라요.”
“...”
“운동 좋아하는 제가 동네에서 운동하다가 우연히 듣게 됐거든요.”
“어느 동네?”
“아, 전 서울에서 왔어요. 성북동이라고...”
“서울 사람이 여기 사는 내 얘길 어떻게 듣게 됐지?”
그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