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과업 1-9 결의

by 꿈꾸는 노마드

하숙 생활은 고아원 생활보다 훨씬 편했다.

돈이 들어가긴 했지만, 기남은 몸은 고등학생이어도 정신만큼은 어른이므로 상황에 대처하기도 생활하기도 훨씬 나았다.

그리고 돈 문제라면 그건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자존심을 내려두고 기남은 아버지인 남두철에게 편지를 보냈다.


[일이 생겨 절 돌봐주던 분 집에서 나와 혼자 생활하게 됐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턴 제게 직접 돈을 부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전의 생에선 급할 때 그가 기남의 부탁을 거절했었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에 남두철은 순순히 그의 청을 들어줬다.

물론 그가 청을 거절했다면 기남은 초능력을 쓸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기남은 큰 걱정 없이 혼자서도 생활할 수 있었다.

그 밖에 자기 안에 이미 축적된 정보로 돈 문제를 해결하는 게 그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가 보내준 돈에서 사용하고 남은 건 박흥식 이름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박흥식은 공부하는 틈틈이 합법적으로 주식과 그 밖에 뭉칫돈이 될 만한 것을 두루두루 하고 있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대한민국엔 IMF 사태라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지만, 그 역시 모든 이에게 고난의 시간은 아니었다는 걸 기남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고 현재의 난 그와 관련된 생각을 할 필요조차 없지.

그것보다 지금 급선무는 나 자신을 앞으로 전진시키는 일 뿐이야!’


몸이 성인이 됐을 때 번듯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초석을 확실히 닦아두는 일이 그에겐 시급했다.

생각에 한참 잠겨있던 그때 기남의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남은 방문을 열었고, 방문 앞엔 박흥식이 강시 같은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기남아! 이거! 울 엄마가 너 갖다 주래!”

“어, 이게 뭔데?”

“뭐긴 뭐야. 반찬이지.”

“아, 감사! 그런데 매번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흐. 암튼 많이 감사하단 말씀 꼭 전해줘!”

“고맙긴! 우리 엄만 니가 은인이라고”


어색해진 기남이 화제를 돌렸다.


“근데 형 얼굴하고 표정이 왜 그 꼴이야?”

“내가 어때서?”

“아휴. 공부도 좋지만, 하루에 한 번 밖에 나가 공기도 좀 쐬고 그래. 얼굴이 영!”


박흥식이 얼굴을 문지르면서 반문했다.


“왜? 뭐가 어때서?”

“거무스름하니 남자답던 피부가 완전 우윳빛, 아니 창백해 보일 지경! 크. 게다가 눈 밑은 너구리가 친구 하자고 달겨 들겠어.”

“그래? 흐.”
“이왕 왔으니 들어와.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아냐. 가서 공부해야 해.”
“그래? 그럼, 어머니께 감사하단 말씀이나 꼭 드려줘. 매번 이렇게 주셔서 정말 맛있게 먹고 있다고. 우리 엄마 다음으로 반찬 솜씨 뛰어나신 분으로 인정한다는 말도 꼭! 흐.”
“알았어. 공부하다 모르는 거 나오면 물으러 와! 알았지?”

“그래, 고마워 형! 잘 가!”


기남은 박흥식을 알게 돼 심적으로 안정감이 든 것도 이전 생에 비해 훨씬 나아진 점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 같은 사람을 갖고 있다는 건 분명 큰 축복이었다.

기남은 자신이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지만 외로운 건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외로움이 싫어 의도적으로 사람을 피하다가도 쉽사리 정을 줘버리고 했던 이전의 삶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남은 반찬을 정리해 놓고 엄마 안부가 궁금해 방을 나섰다.

그 길로 기남은 버스를 타고 인희와 동수가 일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먼발치에서 동수의 정육점을 지켜보던 기남은 마음이 저렸다.

인희의 표정이 이전보다 훨씬 무거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반면 동수는 예전보다 더 활기차 보였다.


‘엄만 분명 내 걱정을 하고 있는 걸 거야. 날 여기저기 찾아보기도 했겠지. 내 학교 앞까지 날 찾아왔던 것만 봐도 그렇고.’


엄마한테 걱정을 끼치고 있다는 건 미안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기가 사라짐으로 인희와 동수의 관계가 나아진 듯 보이니 그걸로 족할 뿐.

자기가 적어도 대학생이 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고 기남은 다시금 결심했다.

성인이 되어 엄마를 모실 수 있을 때까지 이제 대략 2년 남짓 남았으니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에 입학하자고 다짐하면서 자리를 떴다.


***


드디어 기남은 원하던 대학에 진학해 대학생이 되었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긴 했지만, 그것보다 먼저 세상의 구조적 모순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의 생에서 사형당하기 전까지 36년을 살면서 그가 본 세상은 모순덩어리였다.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를 착취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려 했다.

원래부터 가진 자만이 그러는 건 아니었다.

기를 써서 개천에서 난 용이 돼도 대부분은 그동안 품고 있던 분노와 원망을 위가 아닌 아래로 토해냈다.

세상은 끝없는 사다리로 형성돼 있었다.

나보다 못한 자를 지져 밟고 올라가는 사다리였다.

기남은 사다리 대신 평행봉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박흥식을 따라 자기도 정의를 구현하는 사람이 되기로 맘먹었고, 결국 법학과에 진학했다.


“기남아! 축하한다! 난 가방끈이 짧아 겨우 검정고시 출신에 사법시험 도전 10년 만에 겨우 붙었는데 넌 좋은 대학 법학과에 합격했으니”

“형! 그런 말 하지 말지? 형은 힘든 환경 속에서도 그 어렵다는 사시 붙은 거고 난 이제 겨우 대학에 붙은 건데!”

“그런가? 그렇긴 하지? 대학 합격보단 아무래도 사시가 좀 더 쎄긴 하지? 크.”

“형! 나야말로 축하한다는 걸 행동으로 하고 싶었어! 우리 오늘 모처럼 맛난 거 먹자!”

“그래. 오늘은 내가 특별히 쏜다! 엄마가 너한테 꼭 고기 사주라고 돈 챙겨주셨거든.”

“그래? 그럼, 뭐 먹어볼까나? 오랜만에 경양식집 가서 비프스테이크라도 썰어볼까?”

“그려! 오늘 배 터지게 한 번 먹어보자! 비프로다!”


둘은 그날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감격으로 맛난 소고기까지 먹으며 행복을 만끽했다.


“형! 나도 형 따라서 대학 공부하면서 동시에 사시 준비하려고 해. 괜찮겠지?”

“글쎄... 난 대학을 안 다녀봐서 잘 모르겠네.”

“쉽지는 않겠지만 일단 해 보고 정 힘들면 방법을 바꾸더라도 일단은 그렇게 해 보려고.”

“그래. 넌 머리도 좋고 의지도 있으니까 가능할 거 같긴 한데. 일단 해 보는 거지 뭐!”

“고마워! 형은 내게 늘 용기를 주고 롤모델이 되고, 또 뭐랄까? 암튼 형 같은 형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그렇게 생각해 줘서 정말 고맙다! 나야말로 넌 우리 가족 은인이란 생각 한 번도 잊은 적 없어. 꼭 갚을게.”

“누가 보면 우리 둘이 너무 오글거린다고 할 거 같은데? 크크.”
“오글거린다니! 뭐가? 진심을 나누고 있는데 누가 그따위 소릴!”


박흥식은 진정성을 담아 기남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걸 아는 기남인지라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기남은 화제를 돌렸다.


“참 그런데 이제 형 사시도 붙었으니 어머니랑 동생이랑 좀 쉬게 하시는 게 어떨까?”

“나도 그렇지 않아도 그런 얘길 비췄는데 어머니나 순애나 꼼짝도 안 해. 놀면 뭐 하냐고 하면서.”

“동생 공부 다시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글쎄... 그 생각을 나도 안 해 본 건 아닌데...”

“그래. 이제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지 뭐. 공부만이 능사도 아니고. 이제 세상이 달라질 테니 본인이 좋아하는 걸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거야.”


기남은 현재보다 15년 이상을 더 살아가면서 겪었던 자기 경험에 비추어 세상이 급변하고 있단 걸 알고 있기에 그런 의견을 낼 수 있었다.

기남의 대학 생활은 순조로웠다.

그는 바깥세상과는 담을 쌓고 공부에만 몰두했다.

밖에선 데모다 뭐다 하면서 대학생들의 현실 참여를 독려하고 있었지만,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자기 할 일에만 매진했다.


‘사람에겐 가야 할 길이 각자 다르다. 누군가는 몸으로 세상과 맞서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머리가 되어 세상을 바꿔야 하기도 한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고, 그는 머리가 되기로 일찌감치 작정한 것이었다.

동시에 엄마를 찾아 모시는 문제도 조금 미루기로 작정했다.

한편 박흥식은 사법 연수 2년 차에 접어들어 검사시보 생활에 정진하고 있었다.

검찰에서 검사 업무를 하면서 바쁜 와중에 큰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대도 사건’으로 도둑질로 무기징역과 보호감호 10년을 구형받고 대기 중이던 범죄자가 법원 구치소 내 환풍기를 뜯고 탈주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화제를 모은 것은 이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 도둑은 도둑이되 나름 원칙을 가지고 도둑질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회 고위층과 부유층만을 대상으로 절도 행각을 벌였고, 연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준수했고, 절도한 재물의 절반 정도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절대 외국인이나 가난한 이들의 재산은 건드리지 않았다.

해서 그는 도둑이었지만 ‘의적’이란 칭호까지 얻게 됐고, 그가 다시 붙잡혔을 때 어떤 이들은 그의 탈주 실패를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박흥식은 이 사건을 담당하게 됐다.

그는 복잡한 자신의 심경을 기남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사람들이 만약 나의 과거를 알게 된다면 분명 이렇게 생각할 거야. 동병상련이라고. 지금 난 검사지만 전쟁고아로 어렵게 살았던 그의 처지를 많이 봐줄 거라고.”

“...”

“하지만 난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왜냐? 난 한 개인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거든.”

“...”

“무릇 검사의 본분은 범죄사실을 수사하고 그에 합당한 법량을 정하는 일이지. 난 그 일을 함에 있어 추호도 사심을 적용할 생각이 없어.”

“역시 형다워!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그가 아무리 선의를 행했다 하더라도 사회가 정한 법의 테두리 밖에 있었다는 사실엔 의문의 여지가 없으니까.”

“그렇지. 우린 오로지 법의 잣대에 의해 공정하게 법을 집행해야 할 뿐이지!”


박흥식은 기남에게 큰 산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기남에게 또 다른 산이었던 존재가 무너져 내리는 사건이 곧 벌어지고 만다.

화, 목, 토, 일 연재
이전 11화첫 과업 1-8 반복과 차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