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남은 요 며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인희의 무표정이 많이 염려됐다.
‘화가 난 것 같은데 뚜렷하게 화를 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화를 푼 것 같지도 않으니!’
인희의 정신 놓아버린 듯한 표정이 그를 몹시 심란하게 만들었다.
학교를 마치고 가게에 가기 전 집에 들른 기남은 집안의 공기가 다른 때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안방으로 간 기남이 닫혀있는 안방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안방 문을 열자마자 기남의 눈에 축 늘어진 인희의 모습이 들어왔다.
인희 곁으로 간 기남은 인희를 세게 흔들었다.
아무리 세게 흔들어도 인희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놓인 연탄이 보였다.
역시 이전 생에서 벌어진 일이 그대로 벌어지고 있었다.
***
인희가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건 동수의 얼굴이었다.
근심스러운 표정이라기보단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인희를 바라보는 동수 옆에 기남이 서 있었다.
“괜찮아? 당신 때문에 내가 경찰서까지 다녀온 거 알아? 어쩌자고 그런 일을 벌여서.”
인희의 눈에 절망의 빛이 진하게 드리운 것도 모른 채 동수는 제 할 말만 계속 씨부렸다.
“사람 우스워지는 거 한순간이더구먼. 아 나보고 혹시 내가 당신을 그런 거 아니냐고.”
기남이 못 참겠는지 입을 떼려고 하는 그때 인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괜한 일을 했네요. 죽지도 못할 거.”
가슴속에서 치미는 울분 때문에 기남은 미칠 것만 같았다.
불쌍한 사람!
이런 인간 떠나면 될 것을 왜 자기 목숨을 걸었던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기남의 마음을 읽었는지 인희가 기남에게 손을 뻗으며 말을 건넸다.
“기남아! 너도 걱정 많이 했지? 미안하다.”
기남은 눈물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그녀 손을 꼭 잡으며 애원하듯 내뱉었다.
“제 걱정은 마시고 빨리 완쾌하세요. 제발요!”
다음날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인희는 서서히 평상심을 찾는 듯 보였다.
이제 죽기보단 살 결심을 한 사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인희가 이전보다 동수에게 더 순종적으로 보인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상한 게 또 있었다.
기남에게 대하는 태도도 이전과 비교했을 때 많이 달라졌다.
뭔지 모르게 기남과 거리를 두는 듯 보였다.
기남은 깊은 슬픔에 휩싸였다.
결국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인희는 뭔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듯 보이는 것까지도.
생각해 보니 그동안 기남이 알았던 여자들은 다 그랬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소극적이거나 상황을 회피하므로 문제를 벗어났다고 생각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자식을 낳아놓고 그 자식을 버리고 떠난 생모,
남편의 위선과 외도에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 눈을 감는 건 물론 타인을 향한 부당한 처사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진희,
폭력을 일삼는 남편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포기하는 삶을 선택한 인희,
하다못해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첫 문장이 좋아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갔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안나 역시 현실을 회피하고 남은 자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인희처럼 자살을 선택해 시도했고, 성공했다.
기남에겐 그런 그녀들이 다들 너무 어리석어 보였다.
기남은 그중에서도 인희를 가장 이해할 수 없었다.
‘충분히 기회가 있는데 왜 그녀는 나와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생각을 여전히 하지 못하고 있는가?
지금도 그녀를 돌볼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라는 걸 그녀는 왜 깨닫지 못하는가?
왜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가? 왜 동수를 떠나지 못하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왜라는 질문 때문에 기남은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많아졌고, 그로 인해 일상생활에 집중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동시에 동수의 가게에 가는 날도 점점 수가 줄었고, 그런 기남을 동수는 대놓고 못마땅해하기 시작했다.
인희에 대한 불만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게 기남에겐 점점 힘든 일이 되어갔고, 그런 기남에게 별 신경을 안 쓰는 듯 보이는 인희의 태도에 기남의 서운함은 짙어져 갔다.
도돌이표처럼 그렇게 악순환이 계속 이어지고 있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친 기남은 다시 한번 인희와 대화를 해봐야겠다고 작정하고 집으로 향했다.
인희는 역시 의욕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그런 인희를 보자 기남은 연민과 미움의 감정이 동시에 자신에게 엄습해 옴을 느꼈다.
‘그녀가 이렇게 당하고 사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벗어날 방도를 함께 구해야 한다.’
이런 자기 생각을 잘 전달하기 위해 깊게 심호흡을 한 기남은 인희 곁으로 다가갔다.
“기남아! 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또 무슨 말할지 나 이미 다 알아.
근데 나 그냥 이렇게 살 거야. 다른 방법이 없어.
죽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되는 거 너도 봤잖아. 고분고분하기만 하면 아무 일 없을 거야.
니가 큰 의지가 됐던 건 사실이었지만 아직 넌 너무 어리잖아.
키만 크고 생각만 깊다고 어른이 아냐. 넌 아직 더 커야 하고 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던 기남이 말을 끊었다.
“아뇨! 우리 둘이 함께하면 못 할 게 없어요. 이전에도 그렇게 살았잖아요. 그때 우리 둘이 얼마나 행복했어요? 아니었어요, 엄만?”
“더 크면 알게 될 거야. 날 이해할 거야. 이게 내 운명이야, 기남아!”
“아니라니까요! 난 뭐든 할 수 있어요. 우리 둘만 행복하다면 뭐든 할 거예요. 학교 안 다녀도 그만이에요. 엄마 일 도우면서 우리 둘이 다시 살면 돼요.”
“...”
“이렇게 그 사람한테 져서 인생을 포기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 우리 다시 해 봐요, 제발!”
“...”
“엄만 정말 비겁해요! 내가 잘할 수 있다는데 왜 날 안 믿어요? 왜요? 나 정말 다 할 수 있다니까요!”
“이게 널 위해서도 최선이야. 순응하면 세상이 편해진단다, 기남아!
그래서 우리 둘을 위해 난 이 방법을 택한 거야!”
“아뇨! 이건 포기고 회피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에요.”
“내 뜻은 이미 정해졌어. 우리 그만하자 기남아!”
기남은 흐르는 눈물을 막을 생각도 없이 인희를 한참 노려보다 옷 몇 가지와 책가방을 들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기남의 눈앞에 지난 생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그 길고양이가 따스한 햇볕 아래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는 게 보였다.
‘차라리 저 고양이가 나보다 낫구나.
어디서나 누워 잘 수도 있고, 부모도 필요 없고.’
순간 기남은 결심했다.
‘지난 생에선 홧김에 집을 뛰쳐나가 고생 끝에 고아원 생활까지 했었지만 이젠 그렇게 하지 않겠어! 그동안 박흥식이 갚은 돈, 아버지한테 받는 돈으로 박흥식이 사는 판자촌 한 곳에서 하숙하면서 공부에 더욱 전념하겠어.
그리고 어떡해서든 엄마를 구해낼 거야. 내가 없으면 그 인간이 엄마를 덜 괴롭히겠지?
아니더라도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다. 엄마를 도저히 설득할 수 없으니.’
기남은 그 길로 도곡동 매봉산 판자촌을 찾았다.
박흥식을 만나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고 며칠 그의 방에서 신세를 졌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한 집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하숙생이 된 첫날 그는 자기 방에 누워 생각했다.
‘지금까지 이전 삶보다 나아진 게 있다면 그건 첫째, 박흥식을 비롯한 5명의 생명을 구했다는 것. 둘째, 담임을 찾아가 그에게 신세 지다 결국 고아원으로 갔던 거 대신 하숙생이 됐다는 거다. 앞으로 이전 생보다 꼭 더 나은 삶이 되도록 더 노력해야지!’
그러다 기남은 자기가 왜 인희의 생각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지 않았는지 다시 곱씹었다.
사실 기남은 인희의 생각조차 자기가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거기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박흥식의 살해를 막은 것은 정확한 명분이 있었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동수의 폭주에 제재를 가한 것, 즉 따끔하게 혼쭐을 내준 것도 명분이 충분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인희의 사고체계를 변형하는 건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기남이 자기에게 주사위를 준 사나이에게 물었었고 알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어디까지,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하지만 그때 그 사나이는 분명히 말했었다.
능력을 쓰는 건 기남이 결정하고, 고민해야 할 일이라고 말이다.
‘고민해야 한다?’
거기에 답이 있다고 기남은 결론 내렸다.
합당하고 적절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뚜렷한 명분 없이 편의를 위해 능력을 남용하는 건 배제하는 게 맞는 거라고.
기남은 생각을 이어갔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아이들에게 달려가고 싶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지.
내가 살던 삶을 변화시키지 않고선 아이들을 만나봤자 예전과 달라질 게 하나도 없어!
또한 그게 내가 다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조건이었기도 하고.’
그랬다. 기남은 지금 자기 앞에 놓인 상황을 먼저 바꿔놓아야 했다.
기남이 불끈 두 주먹에 힘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