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 기남은 고등학생이 되었고, 인희와 동수가 결혼한 지도 거의 1년이 되어갔다.
동수의 가게에서 일을 마치고 결혼기념일을 자축할 겸 인희와 동수는 모처럼 외식하러 식당으로 갔다.
그리고 얼마 있다 돌아온 인희의 안색을 보고 기남은 지난 생과 똑같은 일이 발생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뒤따라 들어오는 동수는 많이 화가 난 듯 보였고, 인희는 방으로 들어가려다 기남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기남은 지금까지 엄마의 눈이 저렇게 슬펐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동시에 자기 심장에 날카로운 칼날이 꽂힌 것과 같은 아픔을 느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기남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복받쳐 급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눈물을 닦으면서 기남은 생각했다.
‘지난번과 똑같이 행동하는 게 맞는 걸까?’
기남은 지금 인희 곁에 다가가 그녀를 달래주지 못하는 게 괴로웠다.
그리고 동수에게 분노를 느꼈다.
그는 자제심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애써 참으려고 노력했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온 기남은 인희의 표정을 살피며 그녀 곁으로 갔다.
“또 그 사람 때문이죠? 어제오늘 슬퍼 보이는 이유가?”
대답 없이 기남을 쳐다보던 인희의 눈가에 금세 큰 눈물방울이 맺혔다.
“제가 그랬죠? 그 사람이 엄마한테 못하면 절대 안 참는다고?”
“그러지 마, 기남아! 제발!”
기남은 말없이 인희를 남겨두고 밖으로 나갔다.
정육점에 도착하기 전 기남은 곱씹었다.
그동안 여러 방법을 간구해 보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아직 어린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역시 지난 생처럼 조금 더 참고 기회를 봐야 한다.
그래서 기필코 엄마와 내 인생을 이 구렁텅이로부터 구해내야 한다.
기남은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고 정육점 안으로 들어갔다.
기남을 본 동수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곤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어.. 어쩐 일이야, 여긴?”
“죄송해요. 그동안 학교 시험에, 아니! 솔직히 조금 쑥스럽기도 하고 해서 지금에서야 왔어요. 저 여기서 일 도와드릴게요. 뭐든 시키세요!”
기남의 속심을 뚫어보는 듯 기남을 한참 응시하던 동수가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흔쾌히 말했다.
“그래? 좋지~ 그러지 않아도 쟤들 일하는 거 맘에 안 들었는데. 똘똘한 기남이가 도와준다면 나야 좋지!”
“네! 뭐든 말씀만 하세요! 잘 배워서 도움이 되도록 할게요.”
그날 밤 동수와 기남이 나란히 집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본 인희의 눈이 커졌다.
그런 인희를 본 기남이 입을 열었다.
“저 이제부터 아저씨 도와드리러 매일 가게 나갈 거예요. 오늘도 많이 배웠어요. 칼 쓰는 법부터 고기에서 기름 떼어내는 것까지. 간간이 바닥 청소도 했구요. 흐흐”
낮의 말과는 너무도 다른 행동과 말을 보이는 기남을 놀란 듯 바라보고 있는 인희에게 동수가 물었다.
“당신이 시킨 거 아니었어?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라니 기남이가 더 대단해 보이네!”
기분 좋아 보이는 동수가 방으로 들어가고 인희가 기남에게 다가왔다.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엄마는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제가 다 해결할 거예요.”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인희가 기남을 바라봤다.
기남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기남은 손이 빨랐고 해야 할 일들을 빨리 익혔다.
그래서 동수는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기남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기남이 아직 어리지만 뭔가 대단한 구석이 있어 보이며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동수도 간파하고 있었다.
인희의 말에 의하면 그렇게 힘든 처지에서도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고 했다.
인희와 결혼한 후 갖은 악행을 저질러도 평상심을 잃지 않고 붙어 있는 아이라는 건 한 마디로 무서운 녀석이란 소리다.
그런 녀석을 상대하려면 조그마한 빌미라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부려 먹지만 언젠가 쫓아내어야 할 대상이라는 걸 절대 잊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기남은 동수의 수를 이미 다 읽고 있었다.
겉으론 이전보다 자기에게 잘 대해주고 있지만, 속심은 그게 아니라는 걸.
그리고 언젠가는 엄마에게서 자길 떼어낼 궁리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그럴수록 기남은 의욕이 솟았다.
기남은 자기에게 내미는 도전장을 거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누가 됐든. 스스로가 든든한 자산임을 기남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기남은 결심했다. 꼭 엄마를 자기 손으로 지켜내겠다고.
한편 인희는 기남에 대한 동수의 생각이 바뀐 듯 보이는 게 여간 다행이지 않았다.
이제 이전의 평화가 되돌아온 것처럼 집안에 평온함까지 감도는 듯 여겨졌다.
동수도 더는 기남을 눈엣가시로 보지 않는 듯했고, 기남도 동수에게 고분고분해 보였다.
문제라면 자신인데, 그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와 기남 사이를 의심했던 동수의 말은 과연 진심이었을까?
아무리 화가 나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하며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살갑진 않아도 묵묵하고 성실한 그의 모습에 나와 기남을 온전히 맡길 수 있으리라 믿었던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오래 혼자 살아 판단력이 흐려졌던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걸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기남의 변한 태도도, 그런 그를 대하는 동수의 태도도 모두 자신을 위한 선의라고 생각하기로 맘먹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쪽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
기남과 인희가 정육점에 드나들면서 전보다 수입이 훨씬 늘어 동수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일하던 종업원 한 명은 내보냈고, 기남은 일당백을 해내고 있고, 인희도 눈치껏 손님을 대해 예전처럼 인희에게 집적거리는 놈이 없어진 것도 동수가 기분이 좋아진 또 다른 이유였다.
어느 날 동수는 일을 마치고 친구들을 만나 술을 거나하게 마셨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주점에 가 고성방가 하며 한껏 흥을 돋우다 결국엔 도우미까지 불러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
그리고 통행금지 시간이 거의 다 돼 집으로 들어온 그는 자고 있던 인희를 흔들어 깨웠다.
“야! 너도 그렇게 놀았냐?”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인 동수의 말에 인희는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너도 그렇게 놀았냐고? 남자들 품에 안겨 술 처먹고 춤추고 키스도 하고 젖무덤도 주물럭히고 하면서 말이야!”
“술이 과한 거 같은데 어서 자요.”
“이게 누구한테 훈계질이야? 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대답해야지, 대답을!”
인희는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런데 동수의 거친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채더니 그녀를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놀란 인희가 동수를 노려봤고 곧 동수의 거친 숨결이 인희를 덮쳤다.
인희는 빠져나오려고 안간힘 썼지만, 그의 힘을 당할 순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동수는 여기저기 피멍 들고 머리채는 엉망인 채 누워있는 인희를 못 본 척하고 일찌감치 집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기남은 방에서 나오지 않는 인희가 염려됐지만 모른척한 채 학교로 향했다.
이 역시 이전의 생에서 봤던 장면이었다.
인희는 홀로 집에 남아 끼니도 잊은 채 망연자실 속에 있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동수는 인희 눈치를 보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미안해! 내가 술을 좀 과하게 먹으면 자제심을 잃곤 해. 그러니까 말대꾸만 안 했어도”
초점 잃은 눈으로 동수를 쳐다보던 인희가 입을 뗐다.
“난 사랑하는 아이와 남편을 한 날에 잃었어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해를 보냈고요.
고아였기에 아무도 의지할 곳이 없어서 더 힘들었어요. 그러다가 고아나 다름없는 기남이 사정이 딱해 걜 받아들이고 나서 사람의 온기를 느꼈어요.”
여기까지 말을 마친 인희가 숨을 골랐다.
“어린아이였지만 옆에 있는 게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지난번 기남과 나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지요. 그리고 어젯밤엔 또 날 의심하는 말을 했어요. 그리고”
“알아. 그건... 미안하다구 했잖아. 화가 나면 나도 모르게 속에 없던 말이 막 나와. 그리고 어젯밤엔 술김에 그냥”
“그건 강간이었어요. 부부지간에도 강간이에요 그런 건.”
“뭐? 강간? 아니 도대체 누가 그래? 부부간에 강간이란 게 어딨어? 우리 아버지도 술만 먹고 들어오면 우리 엄말”
말을 하다 말고 동수는 화가 나는 듯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 밖으로 나가다 문 앞에 있던 기남을 발견했다.
“넌 뭐야? 뭐 하는 놈이 어른들 말을 엿들어?”
“엿들은 게 아니라 엄마 좀 괜찮으신가 보러 오는 중이었어요.”
“뭐 엄마? 누가 엄마야?”
차갑게 내뱉던 그의 입에서 또 다른 막말이 튀어나왔다.
“도대체 집구석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씨X?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놈한테 눈치나 봐야 하고 이건 원 참!”
말을 마치자마자 밖으로 확 나가버리는 동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남의 눈에 살기가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