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박흥식과 기남은 도곡동 매봉산 근처에 서 있었다.
그들은 운 좋게도 조금 전 코딱지만 한 판잣집 매매계약을 마쳤다.
기남 옆에 서 있던 박흥식이 감개무량한 듯 자기가 살 집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다 니 덕분이다, 기남아!”
“무슨 덕분까지! 형이 좋은 사람이니까 운이 따른 거지.”
“아니야! 어제도 니가 온 거 보곤 내가 정신을 차린 거 같아. 동생한테 그런 꼴 보이면 안 되겠단 자각이 갑자기 들게 된 거지.”
박흥식은 자기의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가 기남 덕인 건 알았지만 기남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거까진 당연히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기남은 그냥 기분이 좋았다.
어찌 됐든 박흥식은 어제 그 일을 기남의 공으로 돌리고 있었고, 기남은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우리 집도 갖게 됐고 말이야. 정말 아버지가 보내주신 천산가 봐 넌! 흐.”
잠시 움찔한 기남이 목에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했다.
“큭큭!”
“괜찮아?”
“어 괜찮아. 근데 나 그만 좀 띄워! 형이 자꾸 그러니까 내 맘이 방자해지려고 하잖아.”
“많이 방자해져도 돼! 나 이제부터 널 은인으로 생각하고 살 거야.”
“무슨 그런 소릴. 형이 그동안 성실하게 살아와서 복 받은 거야. 위급한 순간에 이성을 되찾았던 것도, 쉽게 집을 구한 것도, 다!”
“아니! 네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야. 전부 다!”
“아니라니까!”
기남이 격하게 부정했다. 뜨끔함으로 목소리가 되려 커지면서.
“이럴 땐 못 이긴 척하면서 그냥 형 말 들어! 흐흐.”
“아니야! 아니라니까.”
목소리는 많이 작아졌지만, 끝까지 기남은 부정했다.
그때 갑자기 인생을 새롭게 살게 된 사람처럼 박흥식이 결연하게 자기 뜻을 밝혔다.
“이제부터 난 사법고시 공부에 더 박차를 가할 거야.”
“그래. 형은 꼭 사법고시 패스해서 훌륭한 법조인이 될 거야!”
“그래야지! 그래서 형편 어려운 사람들 돕고 살아야지. 너한테 내가 도움받았듯 나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 주면서. 그래야 선행이 선순환되지!”
“형은 그렇게 살면 되고, 근데 난 뭘 하는 게 아니, 뭐가 되는 게 좋을까?”
“너? 글쎄... 먼저 네가 하고 싶은 일부터 생각해야겠지. 뭐 하고 싶은데?”
“하고 싶은 거? 으음... 아직까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아니다! 사실 하고 싶은 게 있긴 해.”
“뭔데?”
“음... 아직은 비밀이야. 말하기 좀 그래서.”
“그래. 넌 너 하고 싶은 거 하고, 난 내가 하고 싶은 거 하자! 그래서 세상을 향해 같이 나가보자!”
“그래, 좋았어! 아자아자!”
갑자기 박흥식이 기남을 뜨악하게 쳐다봤다.
아마도 그런 표현을 첨 들어봐 그런 듯싶었다.
해서 기남은 당황한 표정을 짓다 “아싸 아싸” 하며 얼버무렸다.
***
기남에게 있어 이전의 생과 달라진 건 또 있었다.
원래 생에선 기남이 중2 때 인희는 동수를 만나 결혼했지만, 이번 생에선 기남이 중 3이 되고 나서 둘은 결혼했다.
하지만 일전의 박흥식 사건을 계기로 기남은 이전의 생과 조금은 다르게 진행되는 현재의 삶에 어느 정도 적응됐다.
그리고 인희와 동수의 결혼식이 끝난 후 기남은 지난 생과 확연히 달라진 게 하나 더 있다는 걸 곧 알게 됐다.
동수는 이전과 달리 결혼하자마자부터 본색을 드러내 인희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의처증과 폭력성을 곧 드러냈단 말인데, 인희가 동수의 정육점에 출근해 일을 시작하자마자 손님에게 조금만 친절해도 화를 내다 결국엔 쌍소리까지 내지르고 말았다.
“아이 씨 X! 왜 그런 눈깔로 그 새낄 쳐다보는 거야!”
“내가 어떤 눈으로 봤다고 그래요?”
“니가 그 새끼한테 색기 가득한 눈짓을 보냈잖아! 기분 드럽게!”
“아니 손님한테 내가 왜 그런 눈을 해요? 그리고 그런 눈이라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는데.”
당황한 인희가 그의 이런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며 대꾸했다.
“딱 잡아떼시겠다?! 이게 정말! 그럼, 지금 내 눈이 동태눈깔이라는 거야?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안다는 거냐구? 야! 너 한참 굴러먹던 시절에 하던 짓 나한테 감추려고 해 봤자야! 난 딱 보면 다 알거든!”
“아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지금!”
인희가 화가 나 이렇게 소리 지르자, 동수가 고기 다듬던 칼을 들고 인희 앞으로 다가오며 그녀를 위협했다.
“정말 너 죽고 나 죽고 해 봐야 정신 차리겠어, 너?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 주지!”
그때 거기서 오래 일했던 장씨가 말리지 않았다면 동수는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도 몰랐다.
인희는 너무 놀라 하던 일도 멈추고 집으로 허겁지겁 돌아왔다.
시험을 마쳐 일찍 집에 돌아온 기남이 인희가 사색이 되어 집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 놀라며 물었다.
“엄마! 무슨 일 있었어요? 얼굴이 왜 그래요?”
“기남아! 크흑흑!”
“그 사람하고 무슨 일 있었던 거죠? 그렇죠?”
참았던 울음을 토해내는 인희를 보고 기남은 분명 동수랑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그래도 이전 생에선 한몇 달은 좋았는데, 이번엔 고작 결혼한 지 이주 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였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기남을 보고 인희가 오히려 기남을 위로했다.
“기남아! 그 사람이 그러는 거 이유가 있을 거야. 아마 그런 여자들을 많이 겪어서”
“그러니까 지금 엄마 말은 그 사람 잘못이 없다는 거예요? 뭔 일인진 잘 모르겠지만
여자 이야기가 나오는 거 보니 분명 그 새끼가 엄마한테 의처증 드러낸 거 맞죠?”
“아니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인희는 남편의 직장에 출근한다고 예쁘게 마스카라까지 하고 나갔었다.
그 마스카라가 번져 지금 인희의 눈은 마치 너구리 눈 같아 보였다.
한편으로 몹시 측은했지만, 기남은 이렇게 될 줄 이미 알았기에 더 속이 탔다.
그래서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요? 이 결혼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결국 이게 뭐예요?”
“그래! 다 내 잘못이야! 미안하다 기남아!”
기남은 화가 나 밖으로 확 나가버렸다.
뭔가 조치를 취하고 싶었다.
착하고 순박한 인희를 괴롭히는 인간을 그대로 둘 순 없었다. 반드시 응징해야 했다.
정육점 앞까지 간 기남이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나온 동수가 기남을 발견하고 가까이 왔다.
“넌 왜 여기 있는 거야? 뭐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온 거야?”
자못 위협적인 어조였다.
기남은 그가 뭐라고 도발해도 참아야 한다고 맘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이 인간이 인희를 괴롭힌 만큼 따끔한 맛을 봤으면 좋겠다고 순간 생각했다.
그때 놀랍게도 지나가던 개 한 마리가 그를 향해 으르렁대더니 갑자기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물어뜯었다.
졸지에 일을 당한 동수는 괴로움에 소릴 내지르고 있었다.
옆에서 그 광경을 보면서 기남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가 개에게 당하고 있는 것에 놀란 게 아니라 자기가 맘속으로 간절히 염원하니 소망이 현실이 된 게 놀라운 거였다.
지난번 박흥식 일도 그렇고 일단 자기가 뭔가를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 그게 바로 자신의 능력이란 걸 이걸 통해 기남은 다시금 알아챘다.
정말 급할 때 원했던 건 다 이루어진 걸 보면 이번 생에서 자신이 가진 능력은 그게 분명하고, 한 번이 아닌 여러 번이 가능하다는 걸 기남은 또 알게 됐다.
‘그렇단 말이지! 명분이 확실하되 간절하게!’
기남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은근히 미소를 지었다.
앞에선 정육점에서 뛰어나온 장씨와 직원이 동수를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마지못해 기남도 웃음을 거두고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그 일로 동수는 며칠 정육점에 나가지 못했다.
넘어지면서 골절한 팔과 얼굴에 입은 상처 때문에 매일 병원에 통원 치료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인희가 정육점으로 출근해 일했다.
놀랍게도 인희가 가게를 혼자 도맡게 되자 이전보다 매출이 훨씬 뛰었다.
동수는 한편으론 신이 났지만, 그걸로 인희가 혹여 자기를 낮춰 볼 걸 우려해 불안해졌다.
그래서 하루빨리 완쾌해 정육점에 출근하길 원했다.
동수가 개의 습격을 받아 호된 고통을 당한 일로 그들 둘 사이엔 암묵적인 화해가 이뤄졌다.
아니 화해는 아니고 그냥 이전 다툼이 묻혔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한편 기남 덕에 집까지 얻고 더욱 공부에 몰두하게 된 박흥식은 온종일 방구석에 틀어박혀 사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흥식의 동생 순애는 기남 말대로 근처 식당에서 이전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일을 시작했다.
흥식의 엄마 역시 근처에 들어선 아파트에 찬모로 규칙적으로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게 다 기남의 덕이라는 걸 박흥식은 한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해서 박흥식은 기남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든 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그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또 박흥식이 사시 준비에 전념할 수 있도록 기남은 최근 들어 그와의 만남을 되도록 자제했다.
대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기남은 집중했다.
그는 학교 공부도 열심이었지만 책 읽기와 글쓰기에도 힘을 쏟아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