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늦게 도서관을 나서던 기남은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죽기 전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밤하늘은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대지에서 뿜어 나오는 봄의 냄새 또한 그때나 지금이나 같았다.
문득 기남은 아이들 생각이 났다.
지금쯤 민식이와 윤식이는 꽤 자랐을 텐데 어찌 지내고 있는지 그게 궁금해졌다.
더불어 그때 시간과 지금 시간이 같은 건지 다른 건지 그것도 궁금했다.
그러다 기남은 머리를 도리질했다.
‘아니야! 현재 삶에선 현재에만 집중하자!
이제 한 번만 더 과거로 돌아가고 나면 다음번엔 아이들 볼 수 있으니 그때까지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도록 거기에만 열중하자!’
이렇게 맘먹은 기남이 버스를 타기 위해 교정을 지나가는데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밀려들었다.
‘그나저나 이번 생에서 엄마를 살려냈으니 이제 한 명만 더 살려내면 되는데 누굴 어떻게 살려내야 하는 거지?’
진 기남이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그때 골목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기남은 주의를 기울여 듣기에 집중했다.
“야 이 땡글아! 내가 뭐라고 했어?”
“어?”
“너 오늘도 돈 마련해 오지 못하면 내가 황천길 구경시켜 준다고 했어, 안 했어?”
“그게... 어... ㅁ마가...”
말이 부자연스러운 한 아이가 겨우 자신을 변호하는데 그때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윽! 때...리지... 아!”
계속 매를 맞는 아이, 그리고 인정사정 보지 않고 주먹질을 해대는 아이 앞에 기남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이! 야! 너!”
고개를 돌린 불량스러워 보이는 고딩이 기남을 째려보면서 험악하게 말했다.
“가던 길이나 가쇼! 그 샌님 같은 얼굴에 스크래치 내기 싫으면!”
제법 호기롭게 외치는 그를 향해 기남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너 내가 말로 할 때 그만둘래? 아님 쥐어 터지든 어디가 부러지든 하고 나서 손이 발이 되게 얘한테 빌래?”
“뭐라는 거야? 재수 없게!”
“너한테 한 번 더 기회 줄게. 빨리 대답해라. 어떤 거 할래?”
“이게 정말! 으윽!”
기남이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데 그 아이가 갑자기 땅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스러워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또 한 명의 아이가 놀란 눈으로 기남을 바라보며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 기남이 고통스러워하는 아이 앞으로 다가갔다.
“야! 일어나서 빨리 쟤한테 사과해!”
“씨 X! 뭐야 너? 아 아~”
그 아이가 다시 고통에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기남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할 거야? 아님 더 당하고 할 거야? 빨리 정해라!”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알았어요!”
그 아이는 기다시피 다른 아이 쪽으로 몸을 옮겨 그 앞에 앉았다.
“무릎 꿇고! 진심을 담아 어서 사과해!”
“아이... 알.. 알았어요!”
기남의 눈치를 보면서 그 아이는 무릎을 꿇은 후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동안 삥 뜯고 때린 거 미안해!”
“앞으로의 각오도!”
“이제부터 절대 안 그럴게.”
“정말이지? 정말 앞으로 안 그럴 거야?”
“네.”
“가만! 한 번 들어보자! 네 진심이 곧 나한테 다 들릴 거거든.”
기남은 집중해 그의 마음을 읽었다.
그러자 그 아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지랄! 오늘 재수 정말 옴 붙었네! 너 담에 만나면 완전 작살내 줄게! 어! 이게 뭐야?”
기남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그 아이의 왼팔이 완전히 비틀어지도록 만들었다.
“아 아 아!~”
“내가 그랬지? 네 진심을 난 들을 수 있다고! 뭐? 지랄! 오늘 재수 정말 옴 붙었네?”
그 아이가 그 와중에도 놀란 눈으로 기남을 쳐다봤다.
“그래서 너 벌 받은 거야. 밥 먹고 똥은 닦아야 하니까 오른팔은 냅뒀지만, 니 왼팔은 이제 완전 회복 불가능할 거다! 평생 그런 몸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지.
앞으로 또 얘 괴롭히면 그땐 오른팔마저 완전 똑 분질러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라!”
기남이 다른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부드럽게 물었다.
“넌 이름이 뭐야?”
“박.. 지... 우...입니다.”
“만약 쟤가 너 한 번만 더 괴롭히면 나한테 연락해! 여기 내 전화번호!”
하면서 종이에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그 아이는 그걸 받아 들곤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다 아픈지 인상을 썼다.
“애쓰지 마! 그리고 어서 집에 가. 엄마가 걱정하실라.”
“네. 감사... 합.. 니다... 아!”
이 틈에 바닥에 쓰러져 아파하던 불량배가 기남 눈치를 살피며 일어나더니 쏜살같이 달아났다.
기남과 박지우는 동시에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어느 날 인희와 밥을 먹던 중 TV를 보던 인희가 입을 열었다.
“아이구 저런! 어째 저런 일이 있다니?”
읽던 신문을 내리고 기남의 눈이 TV 화면을 향했다.
그곳엔 한 중학생 유괴 사건이 보도되고 있었다.
소아마비로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는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밖으로 나간 뒤 연락이 없다가 유괴범의 전화로 유괴됐다는 걸 알게 됐다고 전했다.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에 기남은 몸을 떨었다.
‘어쩌지? 이 아이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옆에 있던 인희 입에서 나지막하게 작은 외침이 새어 나왔다.
“어린 게 어디에 있는 거야? 어서 집으로 돌아와야 할 텐데!”
기남은 먹던 밥을 남기고 외투를 챙겨 밖으로 향하며 인희에게 말했다.
“엄마, 저 급한 일이 생각나서 나가니까 혼자 드세요. 죄송해요.”
인희가 놀란 눈으로 기남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집 밖을 나온 기남은 당황스러웠다.
‘이상윤이라는 그 아이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그 아이를 죽인 살인자는 그 아이와 가까운 거리에 있던 사람이었다.’
어떻게 된 조화인진 모르겠지만 기남의 머리에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기남은 알 것 같았다.
북한 강변에 도착한 기남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조건 버스에 올라 이곳으로 향한 기남은 자기도 모르게 그 아이가 묻힌 곳 앞에 서 있게 되었다.
그곳에 그 아이 시신이 있다는 걸 알지만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기남은 근처 공중전화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통령까지 나서 아이를 찾겠다고 애썼지만, 여전히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유일하게 범인을 아는 건 기남이뿐이었다.
기남은 그가 조만간 잡히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가 되면 법이 알아서 그를 단죄할 거였다.
하지만 법 이전에 그 어린 생명을 앗아간 인면수심 범죄자를 기남은 용서할 수 없었다.
기남은 그가 일하는 곳으로 향했고, 그를 찾아냈다.
“주 선생님! 여기 어떤 분께서 뵙기를 청하는데?”
말과 함께 고개를 돌리는 그 사나이를 기남은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가 기남을 향해 다가왔다.
“누구시죠?”
“난...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밖에 나가 말씀 나누죠.”
기남이 담담하게 응답했다.
별 의심 없이 그가 기남을 따라 교무실 밖을 나왔다.
기남은 뒤따르는 그를 앞서 운동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누구신지 먼저 밝히시는 게”
“잔말 말고 따라와!”
거칠게 말을 자르며 기남이 뒤돌아섰다.
그가 멈칫하자, 기남이 차갑게 외쳤다.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곱게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난 네가 한 짓을 알고 있는 사람이거든!”
순간 기남은 놀라움으로 커지는 그의 두 눈을 똑똑히 보았다.
버벅거리며 그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린지 당최”
“어차피 넌 잡히게 돼 있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안 돼서 말이야. 교사라는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말도 다 끝마치기 전 기남의 투박한 손바닥이 그의 앞이마를 강타했다.
그가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외쳤다.
“뭔 소리를 하는 거냐고? 내가 대체 뭘 어쨌다 아!~”
이번엔 기남의 오른쪽 발이 그의 가슴팍에 꽂혔다.
이런 인간에겐 그저 고통을 주는 걸로는 부족하단 걸 깨달은 기남은 평생 그가 후회하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작정했다.
“잘 들어! 넌 널 믿고 따르던 제자를 살해했고, 여제자를 겁탈하고 범죄에 끌어들였어!
너 같은 인간은 법으로 심판받는 걸로는 부족해! 알아?”
그가 놀랍다는 눈빛으로 기남을 쳐다봤다.
“당신 도대체 누군데 그런 걸 다...”
“난 정의를 위해 악행을 벌하는 사람이야! 너 같은 인간오물들을 처리하는 사람!”
말과 동시에 그의 오른쪽 발이 이번엔 그의 사타구니를 향해 거칠게 뻗어나갔다.
“아!~ 아!~ 내 소중한 여길!”
바닥을 뒹굴며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는 그를 향해 기남이 쏘아붙였다.
“이제 넌 평생 남자구실은 끝이야, 알아들어?”
기남은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이 정신을 집중하면 무지막지한 힘이 발휘된다는 걸 알게 됐다.
그의 손과 발은 그야말로 악인들을 향한 최종병기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