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기남은 수업에 들어가 다른 책을 펼쳐놓고 한참 딴짓을 하고 있었다.
그때 뒷문이 열리면서 한 여학생이 허둥지둥 뛰어 들어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곧바로 기남 곁에 다가와선 그 옆에 바짝 다가앉았다.
기남은 그녀를 쳐다봤고, 곧이어 남자 둘이 누군가를 찾는 듯 창문을 통해 밖에서 안을 살폈다.
그녀는 기남에게 더욱 바짝 다가앉으며 그의 책을 빼앗아 자기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그 책을 보곤 놀란 눈을 하더니 기남을 쳐다봤다.
곧 밖의 두 남자가 사라졌고, 그녀는 비웃는 표정과 함께 기남에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법학과 학생이나 돼서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해야 하는 이 중차대한 시기에 한가하게 미 제국주의 경제서나 읽고 있다니!”
기남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 그녀 앞에 놓인 책을 다시 자기 앞에 갖다 놓으며 눙쳤다.
“다 각자 사정과 꿈이 다른 거 아닐까?”
그녀가 그의 당당한 모습에 열불 나는 듯 소릴 높이려다 참으며 일갈했다.
“시대의 부름에 역행하는 너 같은 건 대학생 자격도 없어!”
그녀는 화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기남은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수업이 끝나 밖으로 나오는 기남 옆으로 아까 그 여학생이 다가왔다.
“저기...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말이야.”
“...”
“법학과 학생이 경제서를 읽는 거 보니 경제에 꽤 관심이 많은가 본데, 경제학과 학생으로 한마디 할게.”
“...”
“고전 경제학의 기초인 국부론에 의하면 말이지. 애덤 스미스는 거기에서 독점과 세금 우선권, 그리고 로비 집단, 자신의 힘이 아닌 다른 사람 노력에 의한 특권은 경제 체제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위협한다고 했어.”
“...”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각자 개인이 자신이 처한 조건을 발전시키는 것만으로도 사회가 부와 번영으로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말이지.”
“...”
“그리고 덧붙여 그걸로 인간의 법칙이 작동하지 못하는 여러 부적절한 방해물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했고.”
“그러니까 그쪽이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뭐?”
“내가 생각하기에 그쪽은 그저 외운 이론만 앵무새처럼 떠들어대고 있는 거 같은데 말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지금 한가하게 책상머리에서”
“그래 그쪽 말대로 책상머리에서 배운 게 다는 아니지. 현실은 훨씬 복잡 미묘하니까.”
“...”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에겐 다 각자의 길이 있는 거야. 누구에게도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 없으니까 그쪽 오지랖은 사양하겠어!”
기남이 말을 마치고 가던 길을 가려고 하자 그녀가 그를 막으며 말을 이었다.
“나 배고픈데 우리 라면이나 먹으면서 얘기 좀 더 하면 어떨까?”
그들은 자리를 옮겨 허름한 라면집에 앉아 서로를 바라봤다.
그녀가 기남을 꼼꼼히 살피더니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 내가 장황하게 경제 이론 떠들면 대갠 먹히던데 넌 좀 다르네!”
“...”
“그나저나 법학과 학생이 왜 경제서를 읽고 있는 거야? 사시 패스하려고 법학과 들어간 거 아니었나?”
“생각이 바뀌었거든.”
“그래? 어떻게? 아니, 우선 왜 생각이 바뀌게 됐지?”
“법이 만사가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고나 할까?”
“법이 만사가 아니라... 으음. 공감 가는 말이야. 나처럼 훌륭한 일 하려는 애들 잡겠다고 설쳐대는 새끼들이 판치는 세상이니 법, 개한테나 줘버려야 하는 게 맞지!”
“아까부터 느낀 건데 그쪽은 지극히 자기 위주인 듯 보여. 책상머리에 의존한 티가 너무 난다고나 할까?”
“뭐라는 거니 지금? 내가 왜? 뭐가?”
“솔직히 말해서 데모 말고는 지금까지 지 손으로 돈 한 푼 안 벌어봤겠지! 이론은 많이 알아도 현실에선 미숙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걸 아마!”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이름이 뭐야?”
“남기남. 넌?”
“나? 가르쳐줄까 말까? 그래, 좋았어! 아까 조금 빚진 것도 있으니까 가르쳐 준다! 오연주!”
“오연주...”
“학번, 아니 나이는?”
“62년생 범띠.”
“그래? 동갑이군!”
그때 라면이 나왔고, 라면을 보자마자 오연주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기남도 라면을 먹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할머니! 여기 김치 조그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오연주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청하자 할머니가 김치를 한 사발 듬뿍 가져다줬다.
김치와 함께 라면을 맛있게 먹고 있는 오연주를 보면서 기남은 생각했다.
‘어쩜 이 아이는 현실과 거리 먼 이상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군. 아직 어리기도 하지만 뭔가 많이 미숙해 보여.’
그때 그의 눈길을 느낀 오연주가 고개 들어 한 팔로 입을 거칠게 닦으며 말했다.
“종종 만나서 라면 먹자!”
“...”
“내가 요즘 궁색하니까 일단 그쪽, 아니 기남이 너가 먼저 좀 사. 그러면 내가 나중에 한 턱”
“라면 이까짓 거야 매일이라도 사줄 순 있는데, 가끔은 밥도 먹고 다녀라. 그럼 난 계산하고 먼저 가 볼게.”
기남이 일어나자 그런 기남의 모습을 바라보는 오연주의 눈에서 묘한 광채가 빛을 발했다.
기남은 뒤돌아보지 않고 가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그날도 기남은 학교 잔디밭에 앉아 경제 관련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그의 곁으로 오연주가 폴짝 뛰어들며 급박한 어조로 말했다.
“잠깐 나 좀 안아봐! 어서!”
그녀는 기남 손을 끌어 자기 어깨 위에 얹었다.
기남은 당황해하고 있었고, 그녀는 또 허락도 받지 않고 기남 모자를 빼앗아 썼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잠깐만!”
오연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을 찾는 듯싶더니 곧 긴장감을 풀고 모자를 벗어 그에게 돌려줬다.
“고마웠어!”
“너 정말... 완전 제멋대로군!”
“그럴 일이 있단 말이야!”
“왜 넌 늘 쫓기는 거 같지? 혹시...”
“생각하는 그대로야!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위해 내가 좀 바빠!”
“너희 부모님은 아셔? 너 공부 안 하고 이러고 다니는 거?”
“응!... 아니! 모르셔! 어차피 관심도 없으신데 뭐!”
“어? 그건 또 뭔 소리야?”
“아빤 누군지 얼굴도 못 봤고, 우리 엄만 자기 살기 바빠서!”
“....”
“오늘 고마웠어, 정말! 담엔 내가 꼭 밥 한 번 살게.”
그러더니 담배를 꺼내 들어 입에 물곤 기남에게 청했다.
“불 좀.”
기남 눈치를 보더니 놀랍다는 듯 외쳤다.
“너 담배 안 피워? 아직 담배도 안 배우고 뭐 했대?”
기남이 어이없단 표정으로 나지막이 외쳤다.
“운동권 여자애들은 왜 하나같이 담배를 입에 물고 그걸 혁명과 연결 짓는 건지 모르겠어. 농민을 해방하는 것과 담배가 무슨 관련이 있다고 말이지.”
그런 기남을 쳐다보던 오연주 입이 다시 열렸다.
“우린 혁명이 완수되는 그날까지 남녀 구별 없이 앞으로만 전진할 거거든. 아무런 제약도, 구애도”
그때 기남이 말을 잘랐다.
“미몽에서 깨어나기 바란다! 혁명이라는 게 그리 간단한 게 아니야! 더군다나 남녀 구별 없이 전진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것보단 현실에서 해야 할 일을 찾는 게 빠를 걸 아마?”
얼굴에 아무런 표정을 담지 않은 채 그녀는 뭐가 바쁜지 일어나 쏜살같이 저 멀리 뛰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기남은 갑자기 그녀가 어떤 아이일지 궁금해졌다.
기남은 자기가 살던 어린 시절로 회귀한 뒤 그동안 박흥식 살리기와 인희 돌보기에 집중하느라 공부 외 다른 것엔 전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고등학생 땐 법학과를 목표로 공부에만 매진했고, 대학에 들어오고서도 오로지 엄마가 된 인희 보살피는 데 주력했다.
그랬는데 오연주가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기남은 어쩜 그녀도 자기처럼 사연이 많은 아이 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게 됐다.
‘저렇게 폴폴 나부끼는 여자 머리카락, 냄새 맡고 만져 보고 한 게 언젠지...’
그러다 기남은 금방 머리를 도리질했다.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민식, 윤식 엄마 나중에 만나 얼굴 어떻게 보려고 딴생각이야 지금! 안 되지! 절대 그래선 안 되지! 아무렴!’
나중에 떳떳한 남편이 되기 위해 이제부턴 절대 오연주는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겠다고 기남은 결심하면서 책 읽기에 다시 집중했다.
그때 곁에 있던 아이들끼리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들었어? 그 유괴된 중학생 있잖아, 이름이 뭐더라? 아 그래. 이상윤! 걔 결국 살해됐대.”
“정말? 어쩌냐?”
“범인이 누군지 알아? 글쎄 걔 체육 선생이란 인간이 그 아일 납치해서 살해한 거래.”
“뭐? 선생이 살인을 했단 말이야?”
“거기에다 그 인간 여제자들 성폭행도 하고 이번 범죄에도 끌어들였대. 완전 미친놈, 아니지. 양의 탈을 쓴 이리지. 겉은 번지름한 게 도박도 하고 유부남이 제자들 성폭행도 하고 말이야.”
“와! 선생도 못 믿으면 도대체 누굴 믿어야 되는 거냐? 세상이 말세다 말세!”
기남은 결국 그 인간이 붙잡혀 죗값을 받게 된 것에 대해선 다행스러웠지만 이상윤을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해선 많이 안타까웠다.
해서 기남은 이번 회귀에선 꼭 어린 생명을 구했으면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