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희는 요즘 살맛이 났다.
한 번 찾아왔던 동수는 더는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고, 무슨 이유인지 이혼하자고 서류를 보냈는데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깔끔하게 정리가 안 된 게 조금 껄끄럽긴 했지만 집은 원래 그 사람 집이었고,
결혼하면서 통닭집과 집 정리한 돈은 은행에 들어있고,
굳이 아깝다고 한다면 살림살이인데, 그것도 이젠 쳐다보기조차 싫어 차라리 다행이다 여겨졌다.
‘돈만 있으면 그까짓 살림이야 다시 장만하면 되는 거지 뭐! 이젠 기남이랑 재미있게 살 일만 남았어!’
이렇게 생각하니 기운이 절로 솟았다.
그래서 그녀는 기남이 들어오면 외식하자고 할 참이었다.
기남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인희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기남아! 오늘 우리 외식하자!”
“외식이요?”
“응. 엄마가 너 맛있는 거 사주고 싶어서 그래.”
“난 엄마가 해 주는 건 뭐든 맛있긴 하지만, 그러죠 뭐! 뭐 드시고 싶으세요? 제가 사드릴게요.”
“아니야! 내가 사줄게. 너 뭐 먹고 싶니?”
“그러시면, 우리 목살 먹을까요? 갈매기살도 좋고요!”
“그래. 그럼 그거 먹으러 가자!”
고깃집에 온 그들은 맞은편에 앉았고 곧 음식을 주문했다.
주문을 마친 인희가 신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기남아! 이제 그 인간 정말 포기한 거 같은데, 그래도 이혼 깔끔히 해결하는 게 낫겠지?”
“그렇죠. 근데 이혼서류 보냈는데도 아직 연락 없어요?”
“응. 너무 조용하니까 또 맘이 불안하기도 한데.... 별일 없겠지?”
“네. 사정이 있나 보죠, 뭐. 좀 더 기다려 보세요.”
그때 고기가 나왔고 인희가 고기를 불판에 올리려고 하자 기남이 잽싸게 나섰다.
“엄마는 가만히 계시다가 고기 구워지면 드세요. 제가 다 할 테니까!”
기남이 고기를 불판에 보기 좋게 올리고, 버섯, 마늘, 양파도 올렸다.
그런 기남을 기특한 듯 바라보며 인희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네가 구워줘! 아들이 구워주는 고기 먹어보자! 흐.”
그때 기남 눈에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오연주였다.
앞치마를 두르고 뭔가 열심히 하는 모습이 신경 쓰여 기남은 자주 그곳을 훔쳐보게 됐다.
그런 기남을 눈치챈 인희가 그의 눈길을 따라 부엌으로 눈을 향하더니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혹시 아는 애야? 참하게 생겼네!”
“네. 아니... 그냥 학교에서 오다가다 본 애예요.”
“그래? 그냥 오다가다 본 것 같진 않은데? 니가 꽤 신경 쓰는 눈친데?”
“그게...”
기남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자 인희가 말을 이었다.
“니 나이가 딱 연애하기 좋은 나이긴 하지! 물론 넌 공부하느라 정신없긴 하지만. 참 너 요즘 그러고 보니 사시 공부는 안 하는 거 같던데, 그만둔 거야?”
“네. 사시 안 보려고요.”
“아니 왜? 니가 좋아하는 형 따라 검사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근데 그게 좀 그래서요.”
“뭐가 어떤데? 덕분에 나도 검사 아들 두면 좋은데....”
“법이 만사도 아니고, 법 그거 그렇게 믿을 게 아닌 듯 보여서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래도 우리 같은 서민들은 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건데. 나만 해도 지현이하고 지현이 아빠 그렇게 되고 가해자 측을 법이 심판해 줘서 맘이 훨씬 나아졌는데.”
“그게 케이스 따라 다르긴 한데, 법망을 벗어나는 케이스도 워낙 많고 또 법이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경우도 꽤 되거든요.”
인희가 많이 아쉬운 듯 할 말을 계속 이어갔다.
“아이 그래도 그건 아니지! 큰걸 봐야지! 뭐가 어찌 됐든 우리 같은 사람은 그나마 법이 있고 법을 지켜주는 분들 덕에 숨통 트고 사는 건데.”
“네. 엄마 말씀 잘 알아요. 다시 생각해 볼게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기남은 생각을 바꿀 맘이 전혀 없었다.
그는 살면서 제도권을 벗어나는 경우를 워낙 많이 봐왔고, 자기만의 방식을 이미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기남이 잠시 후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우연히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불판을 열심히 닦고 있는 오연주를 보곤 순간 그녀를 외면했다.
혹시 자길 보게 되면 그녀가 창피해할까 봐 걱정스러워서였다.
볼일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간 기남이 인희에게 말했다.
“엄마, 다 드셨으면 이제 일어날까요?”
“응? 그래. 난 다 먹었는데 넌 별로 먹지도 않은 거 같은데... 더 안 먹을 거야?”
“네. 저도 다 먹었어요.”
인희가 일어났고, 기남이 계산을 마치고 둘이 밖으로 나왔다.
인희가 기분 좋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들! 잘 먹었다! 오늘 내가 사려고 했었는데 흐. 엄마가 입가심으로 뭐 사줄까?”
“아뇨. 전 괜찮은데, 혹시 엄마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어요?”
“나? 으음... 난 시원한 빙수가 먹고 싶긴 한데...”
“그럼, 우리 빙수 먹으러 가요!”
***
고깃집 다녀온 이후로 기남은 가끔 오연주가 생각났다.
그녀가 자기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리면서 그녀의 일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써도 자꾸 생각나는 게 힘들었다.
그날도 기남은 떠오르는 오연주에 대한 생각을 지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 생에서 어떻게 생명을 구해낼지에 대해 몰두하기 시작했다.
한참 생각에 빠진 그의 곁으로 오연주가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며 그를 놀라게 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나?”
“어?... 오늘도 라면 생각이 나서 오셨나?”
기남은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둘러댔다.
“나라고 매일 라면만 먹을까? 오늘은 뭘 좀 부탁하려고 왔지!”
“부탁? 우리가 서로 부탁하고 그럴 사인가?”
“아, 그게...”
오연주가 순간 무안한 표정을 짓다 금세 표정을 다잡더니 새침하게 한마디를 더했다.
“원대한 뜻을 품은 동지들을 위한 일이니까 법학과 학생으로 한 번만 도와주기 바래.”
“무슨 일인데?”
“내가 대자보를 붙여야 하거든. 그런데 혼자서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나. 그러니까”
“같이 대자보를 붙이자, 이거야?”
“응. 그거야.”
“못 해 난!”
“왜?”
“대자보에 뭐가 쓰여 있는진 모르겠지만 난 지난번에 말했듯이 가야 할 길이 다르거든.”
“그냥 붙이는 거 조금 도와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도 못 해줘?”
“동지들하고 함께 하면 되잖아. 난 동지도 아니”
“흥! 알았어! 관둬!”
삐졌는지 말을 자르더니 오연주가 저쪽으로 뛰어갔다.
기남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날 늦게 기남은 박흥식을 만났다.
생일이라고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며칠 전 약속을 했고, 아주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거였다.
기남이 도착하자마자 곧 박흥식이 들어와 기남 맞은편에 앉았다.
“미안하다. 내가 조금 늦었지?”
“아니야! 나도 방금 왔는 걸. 요즘도 일이 많나 보지, 형은?”
“야 말도 마라. 요즘 데모하는 애들 잡아들이느라고 난리다 난리!”
“데모하는 애들?”
“그래! 각 학교마다 프락치 심어놓고 잡아들인 애들한테... 와! 난 대학 생활 안 해 봤지만 힘들게 공부해 대학 들어간 애들을 너무 심하게 다루고 있어.”
“그래? 으음....”
“넌 정말 그나마 데모 안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너 데모하다 만약 나한테 잡혀 오면 우리 관계 어떻게 되겠냐?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아찔해!”
“그래서 내가 형 생각해서 데모 같은 거 안 하잖아. 형 난처하게 만들 수 없어서!”
“어쭈! 너 농담이 제법 늘었다! 아니지, 농담이 는 게 아니라”
“근데 정말 그렇게 심각해? 여자애들도 들어오고 그래?”
기남이 깊은 관심을 보이며 심각한 얼굴을 보이자, 박흥식이 더 열 내며 말을 이었다.
“물론이지. 남자애들은 주로 행동대원이지만 여자애들은 위장 취업하다 걸려 오는 애들도 많고, 말도 마! 어떤 여자애는 치마 속에 유인물 감췄다가 경찰서 와서 경찰들 앞에서 속옷 다 들춰지고”
“어떻게 민중의 지팡이가 그런 짓을!”
“그게... 경찰도 악이 나거든! 위에서 잡아들이라고 쪼고 그러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형은 어쩔 건데? 형도 그 사람들처럼 그럴 거냐고?”
“어... 너 왜 이렇게 흥분하고 그래? 너 데모 안 하잖아? 혹시 네 친구 중에 데모하는 애 있어? 너 이러는 모습... 첨인데?”
박흥식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말을 더듬었다.
“...”
“뭔 일이 있긴 있나 보구나!”
박흥식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기남은 씁쓸한 심정이었다.
혹시라도 오연주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 함께 문득 화가 났다.
‘공부나 할 것이지 힘겹게 대학 들어와 무슨 짓이람! 게다가 살림도 넉넉하지 않나 보던데 뭔 데모까지! 그나저나 내가 왜 그녈 걱정하고 있는 거지?
남기남! 오지랖 부리지 말고 네 할 일에나 집중하자! 응?’
집에 도착한 기남에게 인희가 마중 나오며 입을 뗐다.
“기남아! 지금 오니? 그런데 너 보겠다고 손님이 와 있어!”
“손님이요? 날 찾아올 손님이 누구”
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오연주와 박지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지? 왜 두 사람이 같이 있지?’
오연주가 반가운 얼굴을 하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남기남이라고 여기 적혀 있어서 혹시 했는데 정말 너였네?”
그녀 뒤에 서 있던 소년 박지우가 환한 얼굴로 기남을 보고 또 입을 열었다.
“혀엉!”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한 기남을 향해 오연주가 입을 열었다.
“얘, 내 동생이야!”